내가 보는 메모
좀 과장하자면, 메타버스(metaverse)가 난리다. 개인적으로, 인간의 감각 체계 안으로 깊이 파고들어 오지 못하는 한, 다시 말해 현실과 보다 끈적하게 밀착하지 않는 한 '혁신적인 메타버스'는 아직 요원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재 일반적인 메타버스는 아직 단순한 가상현실에 가까운 것이라도 하더라도 그 안에서 분명 변화는 싹트고 있다고 본다. 그중 하나가 아바타(avatar)이다. 메타버스가 아바타의 활동영역을 넓히고 그 활동을 현실의 선택에 반영하게끔 유도함으로써, 인간이 메타버스에서 하는 활동이 늘어날수록 아바타는 점점 더 내 정보를 흡수해 나를 닮아갈 것이다.
디지털 도플갱어 시대가 열릴 날이 그리 멀지 않은 듯하다. 디지털 트윈이라는 표현이 더 일반적인 것 같긴 하다. 그래도 디지털 트윈보다는 디지털 도플갱어라는 표현에 더 끌린다. 후자가 전자보다 덜 착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디지털 트윈은 자신의 분신과 같은 이미지가 떠오른다면, 디지털 도플갱어는 내 뇌와는 다른 별개의 정보처리체계에 따라 나 같으면서도 따로 움직이는, 좀 무서운 무언가처럼 느껴진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신상은 물론 일상적인 활동 기록이 상당한 정도로 디지털화될 때 디지털 도플갱어는 자신의 보조 인격으로 인정받게 되는 때가 올지도 모른다.
디지털 도플갱어가 일반화된다면 '내'가 부재중인 상황에서 그는/그것은 나를 대리해 결정을 내리고 필요한 일을 처리할 수 있을 듯이다. 디지털 도플갱어를 구성하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온다. 즉 내가 내린 선택에 대한 정보를 취합하고 분석해 가장 평균적인 값을 도출해 내는 일이 디지털 도플갱어의 활동일 것이다. 그것은 내가 하는 것보다 더 내가 내릴 법한 선택이 될 수도 있으리라고 본다.
이것이 현실성이 있는지 없는지와 무관하게, 그저 '디지털 도플갱어'라는 개념을 통해 몇 가지 의문점이 투과되고 있다.
<의문1. 디지털 도플갱어가 내리는 결정은 나의 미래에 대한 선택으로서 유효한가>
이론적으로 디지털 도플갱어는 (비교적) 일관적인 나의 선택을 대리할 수 있다면 '지금' 미래에 대해 어떤 결정을 내리는 일이 줄어들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을 미리 작성하지 않아도 그와 같은 결정이 필요한 순간이 왔을 때 디지털 도플갱어의 선택을 우선시할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 당시의 디지털 도플갱어가 내리는 즉각적인 선택이 미래에 대한 '내' 소망을 충실히 반영한다고 할 수 있는지는 단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의문2. 디지털 도플갱어는 사회 통념 및 도덕에 순응적이어야 하는가>
디지털 도플갱어는 일종의 소유물이라고 봐야 마땅할 것이다. 그렇기에 그것의 일탈은 소유자인 현실 속 인간이 책임질 일이다. 그런데 디지털 도플갱어는 통제가 가능하다. 디지털 도플갱어는 하나의 애초에 그/그것의 반응이 절대로 할 수 없는 방식을 탄생 이전에 설정해 둘 수 있다. 그렇다면, 내재적으로 선택의 한계를 가진 디지털 도플갱어는 '자신'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그것의 선택이 현실 속의 인간이 내리는 결정보다 일관되게 올바를 때, 그 선택은 살아있는 인간의 결정보다 우선시 될 수 있는가.
<의문3. 디지털 도플갱어는 디지털 영생의 자격을 갖는가>
디지털 도플갱어는 일종의 데이터 복합체(데이터 다발)이다. 이런 개념 위에서 그것은 데이터가 유지되는 한 영생할 수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소유자의 유기체가 소멸할 경우, 디지털 도플갱어가 존속해야 하는지의 문제는 별개이다. 만일 그것의 소유 및 활용에 대한 권한이 소유자 개인에게만 속한 것이라면 소유자의 사망 이후 디지털 도플갱어는 가치 생산에 기여하는 정도가 상당히 줄어들거나 사라질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이때 그것은 정보를 유지하기 위한 전력을 사용하는 등 자원을 소비하기만 하는 데 그칠 수 있다. 디지털 도플갱어가 소유자의 소멸로 인해 그 구속력이 사라졌을 때(해방이라고 해도 되는 걸까), 메타버스의 현실감을 높이기 위해 그것은 메타버스의 배경 자원으로 사용될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이런 경우 소유자의 소멸과 동시에 디지털 도플갱어는 그것의 생성과 구성 및 유지 시스템을 제공한 회사의 지적 소유물로 자격이 변경된다고 해야 할 듯하다. 하지만 그것에 소유자 개인의 인격이 투영되었다면, 단순한 자원으로 활용되는 것은 하나의 인권유린이라고 할 여지가 생긴다고 본다.
물론, 디지털 도플갱어의 출현 자체가 잘못될 가정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뭔가 자기 같은 것을 남기고자 하는 자연적 충동이 기술과 만나면 뭘 만들어낼지 어떻게 알겠나..
어차피 기술 무지렁이이니 내게 이런 건 다 상상의 영역이다. 기운차게 '나라면'이라는 데서 결론을 찾아보자. 나는 일탈과 탈주를 '상상할 수 없는' - 귀찮고 체력 달리고 여러 가지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실제로는 하지 않는지만- 세계에 존재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 데이터 다발들의 세계가 어떻게 돌아갈지 엿보고 싶기도 하다. 아마도 나는 최초의 디지털 인간이 될 수도 없고 최후의 아날로그 인간이 될 수도 없을 것 같다. 내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이런 세계가 도래하지 않는 것이 제일 속 편할 듯하다. 그다음은, 뭐, 알아서들 하시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