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 일할 때 놀면 신나기 그지없다. 평일에 쉬는 날이 끼어있다는 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오랜만에 먼 길을 출타하기로 했다. 잠실 롯데월드에 간다.
잠실과 롯데월드에 가 본지 어언 십 수년. 대중교통으로 간 건 거의 이십여 년만이다. 희미한 기억 속에서는 잠실역에서 지하철을 내려 꽤 긴 거리의 지하 상가길을 걸어 롯데월드에 도착했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개장 시간까지 넉넉하게 여유를 잡고 조금 서둘러 가 보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출근 황금시간대, 러시아워를 꼭 잘 맞췄다. 요새 재택근무이거나 출퇴근 러시아워를 교묘하게 비껴가거나 했기에 사람들 사이에 끼어가는 일도 오랜만이었다. 하지만 난 놀러 가는 중이니 그런 건 감수할 수 있었다.
어른의 감각을 익힌 지 오래되어서인가, 잠실역과 롯데월드 입구는 가까운 편이었다. 보자마자 기억 속 어딘가에서 분출되어 나온 분수대를 지난 걸 보니 분명 같은 길이었는데도 그랬다. 금방 도착해 버렸다. 개장시간까지 넉넉하게 10분 정도의 여유를 생각했는데 막상 도착하고 보니 30분가량이 남았다. 놀랍게도 나와 동행자 앞에는 이미 대기줄이 형성되어 있었다. 더 놀라운 건 그들 중 상당수가 개장해 게이트를 지나자마자 달려가더라는 거다. 평일에 놀이동산에 오픈런이 있을 줄을 상상도 못 했더랬다.
급히 눈으로 질주하는 이들을 좇았다. 그들은 일정한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제일 인기 있는 어트랙션부터 공략하려나 보다 싶어 그들을 따라가기로 했다. 단, 걸어서.
목적지는 역시 ‘아트란티스(여태껏 아틀란티스인 줄 알았건만)’. 일찍 간 보람이 있었는지 오래 기다리지 않고 탑승할 수 있었다. 나와 일행을 가운데 두고 앞자리에 2명, 뒷자리에 1명, 3명의 고등학생들은 일행인 듯했다. 앞뒤의 고등학생들이 한껏 고조된 목소리로 “아하하 씨발!”이라고 외치는 소리를 몇 번이나 들으며 머리와 허리, 온갖 말초 감각을 혹사시켰다.
동행자가 12시부터 시작하는 자이로드롭은 고사했기에 매직 아일랜드에 다시 나올 필요가 없도록 탈 수 있는 건 다 타고 실내로 들어가기로 했다. 다음은 자이로스핀과 자이로스윙. 예상보다 운행시간이 짧아 조금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그 와중에도 몸의 이상반응이 시작되었다. 마스크 탓이었다. 날씨가 달라지면서 이미 며칠 전부터 KF-94 마스크를 쓰고 입술색이 푸르뎅뎅해지고, 원래도 레이노 증후군이 의심되던 손발은 더욱 수시로 보라색이 되고, 두통이 심해지는 등 컨디션 난조가 이어졌다. 그것이 흔들리고 안전장치에 눌리고 하니 산소부족 심화, 멀미에 어지럼증을 불러왔다.
어지럼증의 절정을 불러온 건 ‘후렌치레볼루션(일명 88열차?)’이었다. 탑승 중간에 마스크가 벗겨질 뻔했다. 그걸 다시 정비하려면 마스트 줄을 당기고 고개를 돌려 줄을 귀에 가깝게 만든 후 걸어야 한다. 그런데 그 놀이기구는 360도 회전인 탓에 안전바가 얼굴 양 옆을 막고 고개를 돌릴 공간도 부족했다. 고개를 조금 숙이고 겨우 틈을 만들어 마스크 줄을 귀에 걸었다. 그 사이에 머리는 계속 흔들리면서 안전바에 연신 부딪혔다. 머리가 울리니 어지럼증은 심해질 수밖에. 롯데월드 어드벤처 안에 무슨 음식점이 있나 사전 검색까지 한 주제에 점심은 사이다로 때우기. 그리고 평소에는 밖에서 잘 마시지도 않는 따아(따뜻한 아메리카노)를 꿀떡꿀떡 마시면서 원활한 혈액순환을 꾀했다. 밥은 포기해도 놀이기구는 포기할 수 없다. 그날 나와 동행자는 총 12개의 어트랙션를 탔다.
어린아이들에게 꿈의 세계인 놀이동산은 어른인 내게 미션 투성이 세계인 것만 같았다. 마치 도장깨기를 하듯 어트랙션을 하나씩 하나씩 점령하고 다녔다. 동선이 꽤 좋았는지 오래 대기한 경우도 거의 없었다. 여러 기구를 타니 어트랙션에 대해 예전에는 몰랐던 점들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먼저, 기구 안에 어두운 구간이 많아 탑승자가 속도와 소리에 더욱 원초적으로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만드는 것 같았다. 또 급발진이 많은데 그걸 어느 정도 예측하게 만들어 급발진 직전 몸의 긴장도를 높이는 듯했다. 어트랙션을 설계한 사람은 대체 어떤 얼굴 표정을 하고 탑승자의 감각과 사지를 어떻게 쥐락펴락 할지를 흐뭇하게 고민하며 물리법칙을 주물럭대고 있었을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들은 날 흔드는 데 성공하셨다. 삭신이 쑤시고 말초적인 즐거움이 솟았다. 사실 놀이기구를 타고 스트레스를 해소한다는 건 눈속임 같다. 실제로는 어트랙션을 타는 동안 생리적 스트레스가 한껏 증가하고 내리는 순간 긴장이 한순간에 완화되면서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것 같은 효과가 나타날 뿐일 거다. 그래도 놀이기구를 타는 건 싫지 않고 좋아하는 편이다. 내 몸이 억지로, 다른 힘에 의해 물리법칙을 어긋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왜 마다하겠나. 난 뭘 타고 눈 뜨고 타면서 타율적이지만 인간으로서 자유로운 그 순간을 즐긴다.
하지만 내 자유는 누군가가 그 세계를 지탱해 주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걸 이번에 실감했다. 사람이 적었기에 꿈과 환상의 나라의 노동자들을 바라볼 수 있었다. 꿈의 나라의 수뇌부들은 꿈의 제조자들에게 꿈의 기회를 제대로 제공하는지 살짝은 궁금해졌다.
그리고 남은 궁금증 하나 더. 왜 교복을 입고 다니는 거지? 롯데월드 어드벤처 안에는 교복 대여점도 있다. 교복 착장자들이 자기 교복을 입은 건지 놀이동산의 대여복인지 도통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현실감 있는 교복이었다(나만 모르겠는 건지도). 교복이 젊음의 상징이라 그런가. 그렇다면 교복을 대여까지 한다는 건, 그게 놀이동산을 즐기는 유행의 방식이라는 건 놀이동산은 젊음의 공간이라는 건가.
젊음을 맘대로 규정하지 말라. 아무래도 만 65세 이전에 몇 번 더 놀이동산에 가야겠다(격한 어트랙션은 만 65세 이상은 탑승이 제한된다고 한다). 가서 어른의 저력을 (자체적으로) 검증해 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