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다지 여행 안 좋아하는 자의 여행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겨울이다-시간적 여유가 있다-여행을 가야 한다-여행은 함께 가야 한다>의 사고 연쇄를 가진 어르신들이 1월 22일 설날에 머리를 맞대고 계획을 세웠다. 이번에도 강원도인가, 이번에는 조금 더 가깝고 가 보지 않은 곳으로 가자는 쑥덕쑥덕. 결정된 곳은 대천이었다. 누구도 나에게 "어디 가고 싶은가?"라고 묻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자연스럽게 여행모임의 일원이 되었다. 엄마에게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라고 하소연을 한들 소용이 없었다. 3박 4일의 짐은 출발하는 날 아침에서야 대충 꾸렸다.
여행의 목적지가 대천이라는 건 숙소를 대천에 잡았다는 말이다. 그 이후의 일정은 대강 될 대로 되라다. 엄마에게 인터넷에 떠도는 MBTI 간이 검사를 시도한 적이 있는데 결과는 ISFJ였다. 하나 빼고는 나와 정반대. J 치고 여행 계획이 허술하다. 나는 딱딱한 벽과 지붕이 있는 곳에서 적당히 깨끗한 화장실이 구비되어 있으면 대략 만족이다. 그러니 일단 출발하면 된다. 이번 여행의 운전기사는 엄마다. 나는 인간 내비게이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
사실 대천에 처음 가 보는 것은 아니었다. 몇 년 전, 성주산 자연휴양림에 묵고 보령 근방의 명소라고 꼽힐 만한 곳, 그러니까 대천 해수욕장, 상화원, 무창포 해수욕장 등을 순회한 적이 있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시작부터 그곳들을 찍을 이유는 없다. 이번 여행의 시작은 '대천항 수산시장'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원래 목적지는 '대천항'이었다. 섬러버인 엄마가 호도나 외연도를 가 보고 싶어 했다. 외연도는 당일로 다녀오기 어려운 듯하고 호도 정도는 도전해 볼만 하지 않을까 싶어 배편을 알아보러 갔다. 오전에 배를 타고 호도에 들어가면 도보로 섬을 돌아보고 오후배로 대천으로 다시 나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마침 배가 수리 중이라 일단 들어가면 그 배로 나오지 않으면 다음날이 되어서야 돌아올 수 있다고 했다. 그렇게 예상했던 하루 일정은 사라졌다.
자연스럽게 발걸음은 여객터미널 옆 수산시장으로 향했다. 평일이라 그런지 한산해서 괜히 더 주눅이 들었다. 호객행위는 심하지 않고 시장은 깔끔하다. 전광판에 시세가 나오는 것을 보니 전반적으로 시세에 맞춰 균일가가 책정이 되어있나 보다. 시장 초입에 있는 곳에 (어르신들이) 가서 저녁 식탁을 책임질 이런저런 것들을 한 아름 샀다. 균일가인 대신 이런저런 서비스 등등이 가게마다의 특징인 걸까. 가게 선택 운이 좋았는지 친철하신 사장님께 생각하지도 못한 후한 덤도 받아 들고 대천 해수욕장 근방에 있는 숙소로 출발.
숙소는 이런저런 찬스 덕에 묵게 된 대천국군콘도다. 이 숙소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콘도 앞 해변이다. 대천 해수욕장 옆이면서도 암석이 해변을 가른 덕분에 거의 전용 해변처럼 이용할 수 있는 조용한 곳이다. '수영금지'라고 쓰여 있긴 한데, 과연 여름에 그 주의가 통할지 의문이 들 정도로 해수욕장의 정석처럼 보이는 해변가다. 나는 신발 안에 모래가 들어가는 게 질색이라 해변가를 돌아다니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완만한 모래사장은 바닷물에 젖어 꽤 단단한 덕에 모래를 날리지 않고도 산책할 수 있어 좋았다. 이것이 서해바다의 매력인 것인가. 심지어 모래사장 옆 암석지대가 있어 풍광마저 좋다.
덧붙이자면, 바로 옆 미사일 발사대처럼 보이는 군사시설도 있어서 불안함과 든든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내적 모순을 자아내는 곳이다. 그리고 그런 불안감은 콘도 안 군마트에 가서 여러 저렴한 먹거리, 쓸거리들을 보면 물욕으로 가득 차 금방 사라진다.
2일 차. 콘도 로비에 커다랗게 붙어 있는 관광안내도를 보고 전날 밤 즉흥적으로 정해진 일정. 숙소에서 갈만한 곳 가운데 한 곳으로 군산이 소개되어 있었다. 고군산군도에 가자. 사실 나는 그 정도로 대한민국 남쪽에 가 본 적이 별로 없다. 인생을 통틀어 충청도 이남으로 내려간 경험이, 일 때문에 2-3번, 여행으로도 수학여행을 포함해도 10번 남짓인가. 목포 근방에 처음 갔을 때 따뜻한 남쪽 지역인데 눈이 내리는 걸 보고 놀란 촌스런 인간이다. 군산쪽은 처음이었다. 결국 완수하지 못했지만 이성당도 갈 수 있을까 하는 기대를 안고 출발했다.
고군산군도는 새만금방조제를 거처 새로 조성된 다리들로 신시도-무녀도-선유도-장자도로 이어져 있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장자도에서 대장도까지다. 장자도에서 짧은 방파제인 듯 도로인듯한 것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대장봉이 주봉인 산이 거의 대부분인 것 같다. 장자도에 도착하면 '호떡마을'이라는 표시를 볼 수 있다. 그중 1호점이라는 곳에 호떡을 먹으러 갔는데 시간이 좀 걸린다고 해서 근방에 어디 가 볼만 곳이 있는지 사장님께 여쭤보니 대장봉이 가라고 하셨다. 왕복 1시간 30분 정도라고 했다. '등산'이라는 말은 쏙 빼놓고 거기가 볼 만하고 여기에서는 거기밖에 볼만한 곳이 없다고도 했다. 그렇게 생각도 못한 등산이 시작되었다.
142미터라고 하면 뭔 동산이냐 싶은 분들도 많겠지만, 사실 오르는 길이 아주 수월하지는 않다. 아직은 등산로가 정비되었다기보다는 오솔길 위주다. 대신 그만큼 자연 그래도의 느낌이 많이 남아있어 그 부분은 좋기도 하다. 대신, 대장도에 들어와 '할매바위'와 '대장봉'으로 나뉘는 이정표가 있을 때, 할매바위 쪽은 피하는 걸로. 하산은 그쪽으로 했는데 그 길은 계단으로 이어지고 경사가 거의 60도 이상은 되지 않을까 싶은 곳이 많은 데다가, 계단 높이가 어른 무릎이나 적어도 정강이 정도 되는 곳도 꽤 된다. 위험하다. 이 쪽이든 저 쪽이든 쉽지는 않은 길이지만 풍광은 좋다. 찬바람을 온몸으로 맞아도 눈에 안기는 풍경은 부드럽게 넘실대는 파도를 닮은 것 같다.
동해가 물이 땅을 향해 힘차게 내달려 오는 느낌이라면 서해는 물이 포근하게 땅을 덮어 안고 있는 느낌이다. 왜 서해안의 작은 섬들이 사람을 품을 수 있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기도 한다.
산을 내려와서 장자도의 명물, 호떡으로 바람에 날린 영양분을 보충했다. 호떡마을이라고도 하고 여기저기 호떡 장사 천지길래 대체 왜 호떡이 유명한지 사장님께 여쭤봤다. 답변은 의외였다. "모르겠어요. 손님들이 많이 찾으시더라고요." 장자도에 가서 처음으로 호떡을 찾으신 분은 대체 누구실까..
개인적으로 장자도, 호떡, 다리 등등에 못지않게, 한편으로는 더 강렬하게 남은 군산의 기억은 '공단'이다. 고군산군도로 향하는 길, 군산항을 끼고 끝없이 늘어서 있던 엄청난 규모의 공장들. 그걸 만들고 운영하는 인간이 대단하기도 하고, 기껏해야 살고 있는 도시 근교에 있는 산업단지의 한 동짜리 산업체들을 '공장'의 전형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에 놀랍기도 했다. 솔직히 그 거대한 건물들 안에서 인간과 기계가 뿜어내는 에너지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감동적이어서 환경 문제를 잠시 잊을 지경이었다. 자연과 인간, 인간의 여러 활동이 더 잘 어우러지고, 인간이 자연을 더더욱 존중하는 삶을 꿈꾸면서 자동차 배기가스를 내뿜으며(흑흑..) 숙소로 귀환.
3일 차는 근교 탐방이었다. 보령해저터널을 건너 원산도에 가자. 원래 대천에 오는 길에 해저터널을 지나올 요량이었지만 어쩌다 보니 고속도로로 직행이었다. 해저터널이라고 해서 엄청나게 특별한 건 없다. 사실 그냥 긴 터널이다. '해저터널'이라는 사실과 그 안에 담긴 인간의 노고를 알고 가니 '이런 걸 바다 밑에 뚫었다니!' 싶은 감회를 갖는 것이긴 하다. 마치 현대미술 같다. 의미를 발견할 때 비로소 그 가치가 생긴다. 터널 끝에 '드디어 육지가!'라는 감상을 갖게 되는 것이 해저터널의 묘미다.
보령해저터널의 진가는 그 터널의 또 다른 기점인 원산도에서 찾았다. 원래 한적한 섬마을이었을 원산도는 평일이라 그런지 여전히 한적한 섬마을이었다. 새로 개발되고, 바닷가이고, 접근성이 좋아졌다면, 큰 카페가 있을 것이다라는 추론에 따라 검색해 보니 관광객에게 꽤 알려진 곳이 세 곳 정도 있었다. 그중, 설명에 따르면, 귀농한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지역 활성화의 일환으로 운영된다는 '원산창고'를 찾았다. 평일 오전이라 그런지 한산한 카페의 큰 창 너머로 옆 섬의 작은 항구마을이 보였다. 누군가의 삶과 중첩되는 관광은 어쩐지 더 감상적인 관광객이 되게 하는 것 같다.
원산도의 또 다른 명소는 원산해수욕장이었다.
길고 완만하고 사람이 드문 해변이 이어졌다. 대천국군콘도 앞 해변이 왜 수영하기에 위험하다는지 알게 되는 곡선과 각도다. 바닷물을 머금은 모래는 역시 인간을 폭신하고도 단단히 받쳐준다. 여름에 오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바다가 인간에게 그 품을 열어줬다면 아마도 지금보다는 바닷가의 살결을 마주하지 못했을 테다.
돌아오는 길은 대천해수욕장과 다시 대천항 수산시장. 친절한 '사랑수산' 사장님을 다시 찾았다. 이번 여행의 첫 번째 저녁밥과 마지막 저녁밥의 수미쌍관.
마지막 날 오전은 분주하다. 짐정리도 하고, 퇴실 전 군마트도 다시 들러야 한다. 오전의 군마트는 퇴실을 앞두고 염가의 물건을 구입해 가려는 손님들로 북적인다. 우리 일행도 그중 하나. 여행 끝에 짐은 줄지 않고 오히려 늘어난 것만 같다. 쇼핑도 마무리한 후 마지막은 해변가 산책이다.
겨울의 서해바다. 이건 아마 포근하게 사각이던 발디딤으로 기억될 것 같다.
(그리고, 이번 여행의 의도하지 않은 동행자. 연유를 모르겠으나 카메라 속으로 난입해 이 사진 저 사진에 마구 찬조출연한 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