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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ino Feb 09. 2023

사우나 안의 딜레마

집에서 상당히 가까운 곳에 사우나(a.k.a 목욕탕)가 문을 열어 종종 이용하고 있다. 그곳에 다녀올 때마다 몸은 개운하지만 정신은 산뜻하지 못한 채 돌아오는 날이 많다.


사우나에서 내 패턴은 단순하다. 몸을 씻고 온탕과 냉탕을 왔다 갔다 한 후 머리를 감고 몸을 씻고 세수를 하고 온몸에 흥건히 흐르는 물기를 닦는다. 이 정도면 포유류라기보다 파충류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몸이 찬 편이다. 그런 와중에 더위에도 추위에도 민감한 탓에 온탕에서도 냉탕에서도 목 아래 몸 전체를 물 안에 집어넣는 시간은 짧다. 반신욕을 하면서 물멍을 하는 게 사우나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무릇 좋은 일을 하려면 무리하지 않고 할 수 있는 걸 꾸준히 하자는 주의다. 난 씻지 않으면 이불 속에 들어가 베개에 머리를 닿게 할 수 없는 인간이다. 유별나게 깔끔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자는 것’을 지나치게 좋아하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라 잠자는 공간을 신성시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하루 걸러 머리를 감고 샤워하는 일은 상상하기 어렵다. 물은 많이 쓰고 못하고 화학거품도 만들고 있으니 하다못해 물이라도 좀 아껴 써야겠다. 나는 샤워를 하는 내내 물을 틀어두는 종류의 인간이 아니다. 집에서도 안 그러고 사우나에서도 안 그런다.


사우나에 가면 온갖 인간 군상을 만난다. 옷을 걸치지 않고 있으니 몸의 움직임과 그 움직임이 담고 있는 감정이나 의도는 더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 같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어쩐지 더 친밀하고 더 어색하고 더 공격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 살구색 존재들 중 내가 유독 불편하게 느끼는 이들이 있다. 속옷 빨래를 한다거나, 머리에 샴푸 마사지를 하면서도 몸에 거품칠을 하면서도 샤워기 물을 잠그지 않는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 공중도덕규범 곧 상식에 벗어나는 행동을 하거나 물부족 사태를 전혀 상상조차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이다. 그런 행동을 목도할 때마다 어쩐지 듣기에 편치 않을 소리를 하고 싶지만, 선뜻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아니, 솔직히, 못한다. 그럼 분명 큰 소리가 나는 싸움이 생길 것이고 옷으로 가려지지 않는 어색함과 공격성은 수치심도 증폭시킬 거다.


그래서 나는 사우나에서 버클리 주교를 떠올리곤 했다. 인식하지 않는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보지 않으면 그건 내 세상에 없는 것이다. 나는 사우나에서 가급적 사람들에게 시선을 머무르지 않으려고 한다, 그들이 무슨 행동을 하고 있든지 간에.


그렇게 ‘나의 사우나’에서 그 거슬리는 존재들을 지워버리지만 사실 그걸로 모든 껄끄러움이 해소되는 건 아니다. 버클리 주교는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라도 해도 신의 지각 덕분에 존재한다고 했다. 사우나의 무법자들을 내 세계에서 몽땅 없애려면 버클리 주교는 신봉하되 무신론자가 되는 수밖에 없다. 이건 그냥 앙꼬 없는 찐빵이다. 딜레마는 깊어진다.


따지고 보면 이건 두말할 것 없이 내가 비겁하기 때문일 거다. 불의에 맞서는 연습이 현저히 적었던 탓인지, 운이 좋게도 주위에 따뜻하고 상식적인 사람들만 함께 했던 덕인지, 여튼간 나는 용기와 정의감이 얕은 인간인 것만 같다.


그렇지만 기껏 사우나까지 다녀오면서 자기 환멸에 빠진 채 추적추적 돌아올 수는 없지 않겠나.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떠올린 건, 자비로운 비겁자가 되자는 거다. 훈계를 할 용기는 없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이 잘못된 결과를 가지고 올 거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럼 그 잘못을 내가 할 수 있는 방식대로 보완해 결과로 가는 길을 조금 바꿔보자는 식이다. 물줄기를 조금 더 약하게 하고 샴푸도 조금 적게 사용하고 씻는 속도는 조금 빠르게 하고.


물론 내 자비는 사우나의 상식 파괴자들을 위한 건 아니다. 나는 그 정도로 인격자는 못 된다. 그들을 향한 분노는 환경오염에 대한 걱정으로 이어지고 내 자비심은 지구 생태계 친구들을 향해 나아가서는 결국 자기만족으로 돌아온다. 여전히 얄팍한 인간이다. 목욕재계가 마음을 정화해 주지 못하는데 왜 자꾸 사우나에 가는 걸까. 오늘도 사우나 딜레마는 깊어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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