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만에, 스님이 되신 친구를 만났다. 건너 건너 스님이 공부를 이어가시기 위해 상경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여차저차 연락처를 물어 소식을 주고받았다. 그러고 나서도 몇 달 만에 드디어 스님을 만날 수 있었다.
그이는 내가 무척 좋아하는 친구였다. 관심사가 겹친다거나 이런저런 바보 같은 짓거리를 함께 하며 젊음의 유희를 공유하거나 했던 건 아니다. 대학생 시절, 공강시간을 소소하게 함께 보낸다거나 밥자리, 술자리를 갖는다거나 하는 정도였다. 그래도 나는 그이가 참 좋았다.
그이의 매력포인트 그 첫 번째는 사투리였다. 서울 태생에 내리 서울에서만 살았고(지금은 아니지만) 먼 지역으로는 나들이조차 갈 기회가 없었던 나였던지라 그이를 통해서야 일상생활 속에서 생생하게 사용하는 사투리를 가까이에서 길게 들을 수 있었다. 서울말씨만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촌스러운 일인지를 알게 되었다. 독특한 리듬감, 음의 높낮이. 말하는 것이 노래 같을 수 있다는 건 참으로 탐나는 모습이었다.
게다가 그이는 귀엽기까지 했다. 관계를 맺는 방식이 올록볼록 서툴어 보이기도 했지만 마르지 않는 호기심은, 동성임에도, 감히 사랑스럽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인생의 5년 정도는 포대기에 싸여 있다가 폴짝 튀어 오른 것 같달까. 그이는 몰캉몰캉하고 찰랑찰랑한 사람이었다.
스님이 된다고 할 때에, 놀랍지는 않았지만 서운하기는 했다. 그이에게는 아직도 호기심이 넘쳐흐르는 것 같았는데 속세는 더 이상 미지의 세상이 아닌 것일까. 나는 모르는, 그리고 아마도 닿을 수 없는 세계로 훌쩍 넘어서는 그이의 뒤춤이라도 잡고 싶었지만 그건 안 될 일이었다. 그건 될 수 없는 일이었다. 스님이 되고 몇 년 후, 그이가 계신 사찰에 다녀온 적이 있는데, 스님에게는 함부로 손대거나 신체 접촉을 하면 안 된다는 말이, 깊은 수행의 초입에 계시니 당연히 이해가 되면서도 섭섭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깊은 골 산사에는 반가움과 아쉬움이 남았다.
스님을 다시 만난 날, 길 건너편 스님을 발견하고 나는 손을 흔들고 합장을 했다. 도로 한가운데서 우리는 손을 맞잡았다. 이제는 스님의 손을 잡을 수도 있고 옷자락을 꼬집하고 나란히 걸을 수도 있게 되었다.
스님하고의 대화는 즐거웠다. 나는 내가 아는 이야기를 하고 스님은 스님 안에 차곡차곡 쌓인 이야기를 풀어내셨다. 우리의 이야기들은 날실 씨실처럼 하나의 이야기포가 되었다. 부처님께서 탄생에
대해 태생, 난생, 화생이 있다는 말씀을 하셨다는 건 언젠가 어디선가 꼭 써먹어 보리라 생각했다. 우리는 대학시절보다 대화하기가 편해졌다. 스님께 존댓말을 해도 스님께 존댓말을 들어도 더 편했다.
그이가 그저 친구였던 때, 나는 그이가 좋으면서도 ‘아! 이 귀여운 사람아!’라고만 생각했다. 뭐가 좋은 건지 그 원류는 어렴풋하기만 했다. 스님이 된 그이는 여전히 귀여움이 남아 계신다. 그런데 나는 그이의 뭣에 자꾸 마음이 갔는지 이제는 좀 더 선명히 알 것 같다. 스님은 스님이 되셨지만 그 특유의 호기심은 여전하셨다. 다른 사람의 호기심을 들추어 보는 손길도 다르지 않으시다. 스님은 꼭 옹달샘 같다. 세밀한 골로도 여기저기 흘러 새는 옹달샘.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폴짝 건너뛸 수 있는 그 샘은 결국 큰 강의, 바다의 시작이었던 거다. 왜 그이가 더 넓고 깊은 세계로 건너갔는지 이제 뭉근히 알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스님은 당신이 서툴렀고 여전히 조금 느리게 사회화를 진행하시는 듯하다고 하신다. 나는 스님이 뭐뭐 종교 등등의 단단한 틀을 조몰락거려 말랑이게 만든 다음 휙휙 넘나들 수 있으실 것만 같다. 이제 좀 더 가까이에서 그걸 볼 수 있을 듯해 기쁘다.
나의 친구는 스님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