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인수 - 운명의 캬라반‘
나의 하는 꼬락서니를 보면, 지금 나이대를 기준으로 1950-70년대에 살래, 2020년대에 살래라는 질문에 볼 것도 없이 2020년대를 선택할 거다. 시대를 탓할 배짱도, 자신을 탓할 용기도 없으니 어쩔 거냐. 하지만 어쩌다 어쩌다 시절을 거슬러 가고 싶을 때가 있다.
낭만의 옹달샘을 찾아볼 요량이었다. 깊은 산속으로 파고 들으니 ‘남인수’가 나타났다. “우리집에도 남인수 LP가 있었는데”라는 말을 듣고 버리려 내놓을 때까지 아까워서 끝까지 벌벌거렸던 고장 난 텐테이블이 떠올랐다. 남인수 LP 말고도 왜인지 ‘국민교육헌장’ LP, 낭만파괴물이 있었다. (덕분에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고 있다.) 자, 남인수로 가야지.
“남인수 골든”이라고 명명된 앨범을 듣다 보니 꽤 익숙한 곡도 있고 생소한 곡도 있었다. 그렇게 유유하게 흘러가다 귀에 턱! 걸린 곡이 “운명의 캬라반”이다.
조용필에게는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있다면, 남인수에게는 ‘운명의 캬라반’이 있지 않을까. 두 곡 모두 흐릿한 땅 위에 선명한 궤적을 뒤로하는 이름 모를 이가 떠오른다. 게다가 둘 다 나레이션으로 시작하기도 하고. 거기에 두 명곡은 가사가…가사가…대단하다! “무릎 꿇고 손 모아 빌자 속세살이 지은 죄를”이라니… 이 곡을 들으면서 이 곡의 작사가, 작곡가분들은 사막을 가 보셨을까,라고 생각했다. 내심 아니기를 바랐다. 낭만은 동경과 현실 사이 괴리에서 그 내음이 더 짙어진다는, 새로 세운 얄팍한 내 낭만론을 믿고 싶어졌다.
이 곡이 특별한 건, 여기에 감탄한 후에 ‘남인수 골드’ 앨범을 더 진중하게 듣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별 특별한 것 없는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음악에 전문성이라곤 없는 막귀로 들었지만, 어쩌면 그 시절의 곡들이라 특출 난 것 같은 점을, 나름, 박박 파 헤집게 되었다. 남인수라는 가수는 워낙 걸출하다고들 하는데, 한 곡 한 곡이 무언가 ‘노래’라기보다는 ‘음악’이라고 하는 편이 어울릴 듯하다. 뭔 말인고하면, 우선은, 연주가 좋았다. 엄청난 기교가 있다기보다 악기가 소중히 다루어져서 본래의 울림이 강조되는 느낌이랄까. ‘와! 기타다! 와! 색소폰이다!’ 뭐 이런 식으로. 그리고, 보컬이 음률에 앞서기보다 하나의 악기처럼 어우러지는 것 같았다. 깊은 산속 곧게 솟은 나무나 부드러운 이끼, 그 사이를 감아도는 물줄기, 군데군데 솟은 바위돌이 악기라면 목소리는 그 사이를 유영하는 바람이 되어 비로소 숲이 완성되는 듯.
그건 어쩌면 지금 것은 아닐 수 있겠다 싶다. 악기의 질도, 연주의 기교도, 보컬들의 스펙트럼도, 게다가 퍼포먼스를 위한 체력도 그 시절과 지금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실력들은 점점 빼어나져 가지 않는가. 하지만 그 소용돌이를 즐기기에 부족한 지금의 나는 한없이 가벼워져 가기에 낭만의 실오라기 한 올 한 올을 소중히 하는 듯한 그 시절의 모두에게 살짝 질투를 할 수밖에 없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