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도 그리움을 먹는다

by 몽생

나는 요리를 못했다. 지난 2005년 스위스로 인턴십을 떠나기 전까진. 우리나라 웬만한 20대 여자들이 그렇듯, 나도 20대 중반이 될 때까지 항상 엄마 밥만 먹고 자랐다. 내가 할 줄 아는 거라곤 라면과 계란 프라이 정도가 전부였다. 하지만 외국에서 돈 없는 백수, 취준생으로 인턴십을 하면서 물가가 살인적인 스위스에서 외식을 할 수 없었던 나는 비로소 '생존 요리'라는 걸 시작했다.


스위스에서 내가 주로 해 먹은 요리는 피자였다. 마트에는 얇게 반죽한 피자 도우를 돌돌 말아서 2 스위스 프랑 (약 1800원가량)에 판매했는데 난 처음에 이게 치즈인 줄 알았다. 포장지에 생크림과 딸기 그림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고 보니 이 반죽은 피자뿐만 아니라 과일 크레페도 가능한 용도였다.


슈퍼마켓에서 사 온 피자 도우에 토마토 페이스트를 바르고, 토마토와 모차렐라 치즈를 잘라 얹기만 하면 90%는 완성이었다. 이제 이 피자를 오븐에 넣어 200도, 약 15분가량 굽기만 하면 끝. 나의 '생존 요리'는 이렇게 처음 시작됐었다.


2010년 영국에서 석사 유학을 하던 시절엔 돈은 있었지만 파는 음식이 죄다 맛이 없어서 또 다른 의미의 '생존 요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 친구들은 우스갯소리로 "영국 애들은 혀에 미각이 없는 거 같아."라고들 했는데, 정말이지 내가 살던 버밍험이라는 부산급의 소도시엔 괜찮은 레스토랑이 하나도 없었다. 캠퍼스 식당들 마저도 비싸기만 하지 제대로 된 요리를 파는 곳이 거의 없었다. 난 거의 매일 그나마 먹을만했던 '서브웨이' 샌드위치로 끼니를 때우곤 했다.


안 되겠다 싶어 그때 다시 시작한 게 '생존 요리'였다. 나는 손쉽게 파스타 소스만 넣어도 만들 수 있는 토마토 파스타 요리를 주로 했었다. 그리고 종종 친구들을 초대해 파티를 할 일이 생길 때마다 시작한 요리가 바로 '한식'이었다. 이때부터 김치찌개, 된장찌개, 잡채, 닭볶음탕, 심지어 김밥과 삼계탕까지... 외국인 친구들 대접용 한식 요리를 하기 시작한 게 벌써 10년 전 일이 되었다.


어느덧 나는 이제 엉터리 '생존 요리'에서 벗어나 한식 요리 '달인'이 되었다. 지난 10여 년 간 미국, 스위스, 영국, 싱가포르 등지에서 돈 없는 외국인 노동자, 만년 취준생, 유학생, 그리고 또다시 외국인 노동자로 살아오면서, 한국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지는 만큼, 내가 한식 요리를 하는 횟수도 늘어났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싱가포르란 나라에는 탄종파가 (Tanjong Pagar)라는 한국 식당 거리가 있는데, 나는 이제 그곳에서 파는 어느 한식 요리보다 "내가 더 맛있게 잘할 수 있다"며 친구들에게 너스레를 떨 정도의 수준이 됐다.


그리고, 지난 10년 간 내가 해외를 떠도는 사이, 우리 엄마는 '포장의 달인'이 되었다.


4566 km 바다 건너 한국에 있는 엄마는 여전히 지금도 나의 아침부터 저녁까지를 챙겨 주신다. 오늘 아침에 난 호두, 해바라기 씨앗, 아몬드, 치아시드 등 10여 가지 넘는 견과류 가루에 요구르트를 섞어 건강식을 먹었다. 엄마는 가로 5cm, 세로 5cm의 작은 포장용 비닐을 구입해, 그 견과류 가루를 내가 하루 1개씩 꺼내 먹을 수 있도록 소포장했다. 그리고 더운 나라에서도 상하지 않도록 손수 구입한 진공 포장기를 이용해 공기 한 방울 안 들어가게 꾹꾹 눌러 철통 포장을 하셨다.


엄마는 내가 한국에 들어갈 때마다, 일주일 전부터 김장급의 김치를 담그느라 비상이 걸린다. 매일 27도에서 34도를 넘나드는 무더운 열대 기후 탓에 바로 담근 김치가 아니면 금방 쉬어버렸기 때문이다. 엄마는 새로 담근 싱싱한 김치를 지퍼가 달린 비닐에 한번 싸고, 또다시 다른 비닐로 싼 뒤, 진공포장용 비닐에 한번 더 싸고, 마지막으로 진공포장기로 공기를 제거하는 3중 철통 포장의 '달인'이 되셨다. 덕분에 한국에서 어렵게 공수한 엄마표 김치는 언제 먹어도 신선하다.


그제는 엄마표 김치로 보글보글 김치찌개를 끓여 먹었다. 요새는 사 먹는 김치도 맛과 품질이 좋아졌고, 싱가포르 현지인들도 자주 찾아서 일반 마트에서도 언제 어디서나 손쉽게 구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김치로 김치찌개를 끓이면, 달짝지근하면서 김치들이 겉돌기만 해, 고유의 깊은 맛이 안 난다. 그래서 항상 김치찌개는 엄마표 김치로 끓여야 제 맛이다. 들기름으로 김치를 달달 볶다가 지방이 적당히 낀 두툼한 돼지고기를 김치만큼 듬뿍 넣고 계속 볶는다. 그리고 어느 정도 김치와 돼지고기가 익었다 싶으면, 미리 끓여 놓은 멸치 맛국물 육수를 넣고 한소끔 끓인다. 이 엄마표 김치 찌깨는 신기하게도 끓이면 끓일수록 감칠맛이 난다.


엄마는 내가 시래기 된장찌개를 좋아한다는 걸 아시고는 심지어 '시래기 줄기'까지 3중 진공 포장을 해서 보내주셨다. 지난번엔 시래기에 엄마표 된장을 두 스푼 넣고, 마늘과 매운 고추를 잘게 썰어 넣고는 보글보글 시래기 된장국도 끓여 먹었다. 엄마표 시래기 된장국 맛에 비하면 세발의 피였지만, 오랜만에 엄마 손맛을 느낀 듯 행복했다.


엄마는 내가 위장이 약한 걸 아시고는 물만 부어 들깨죽을 끓여 먹을 수 있는 들깻가루도 3중 진공 포장을 해 보내주셨다. 그리고, 내가 휴가 마지막 날 한국에서 갈비찜을 맛나게 먹었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갈비찜까지 꽁꽁 얼려서 3중 진공 포장을 해 넣어 주셨다. 이렇게 항상 한국만 다녀오면 내 트렁크는 엄마표 음식들로 한가득이다. "안 먹는다" "버리게 된다"라고 몇번을 말씀을 드려도 엄마는 고집불통. 말을 듣지 않는다.


이런 연유로, 지난 10년 간 나의 냉장고 냉동칸은 언제, 어디서나 엄마의 사랑으로 꽉꽉 들어차 있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집안에 갇혀 재택근무를 한 지도 벌써 4개월이 되어간다. 봉쇄령에 버금가는 서킷 브레이커 (Circuit Breaker) 발동으로 친구들을 못 만난 지도 어느덧 3개월이 다 됐다. 지난 몇달 간 내가 만난 사람은 고작, 경비 아저씨와 택배 배달원이 전부였다. 나는 오늘도 철저한 고립 속에 은둔형 외톨이가 되지 않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


그래서 매일 하는 게 하나 있는데, 멀리 있는 가족들과의 화상통화다. 나는 매일 엄마와 가족들과 화상통화를 한다.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욕망을 채우면서 외로움도 달래고, 말 동무도 하기 위해서다.


오늘은 오랜만에 엄마표 김치에 참치를 넣고 볶음밥을 만들었다. 엄마는 오랜만에 양배추 채를 잘게 썰어 넣고, 닭고기 가슴살을 얹은 건강식 쫄면을 만드셨다고 한다. 오늘도 나는 화상통화 버튼을 누르고 가족들을 바라보며 밥상머리에 앉았다.


"뭐 먹어?"

"맛있어?"

"보고 싶다~"


우리의 대화는 매일 똑같다. 하지만 지난 6개월 간 보지 못한 그리움은 하루하루 점점 깊어져만 간다.


이제 엄마표 김치 3 봉 중에 고작 0.5봉이 남았다. 평소 같았으면 3개월에 한 번씩 출장이나 휴가로 한국을 들어가서 이미 냉장고는 엄마의 신상 김치로 꽉꽉 들어차 있는 게 정상일 텐데. 이번 코로나 사태로 가족이 졸지에 '생이별'을 하고 '이산가족'이 되면서 지난 6개월 간 집에 가지 못한 탓이다.


엄마는 내가 어제 스쳐 지나가는 말로 "고추 장아찌가 맛있었어" 한마디를 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오늘 또 장을 보러 가신다고 한다. 고추 장아찌를 담그신다며.


"에이, 뭐 벌써 담가?"


미안한 마음에 무심히 건넨 한 마디에 엄마는 답하신다.


"미리 담가둬야 나중에 네가 가져갈 때 더 맛나지."


순간 눈물이 핑 돈다. 역시 엄마 밖에 없다.


반 봉지밖에 안 남은 엄마 표 김치를 다 먹기 전까진 한국에 돌아갈 수 있을까. 아무래도 힘들겠지?

그럼 엄마가 새로 담근 고추 장아찌에 맛이 들 무렵엔 한국에 갈 수 있을까?


"..."


"난 오늘도 그리움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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