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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제이 Jun 14. 2021

대륙의 끝에서체리자유

그놈의 소확행

 요즘 체리가 싸다. 

 새벽배송 '세일중' 카테고리를 쭉쭉 내려보다가 마감 할인하는 과일 리스트에 체리가 있길래 장바구니에 스윽- 담아두었다.

https://unsplash.com/photos/rOWnACMhBbM

 생물 체리를 처음 먹은 건 스무 살 유럽 배낭여행 때였다. 케이크 가운데에 꼴랑 하나 올라가는 체리가 1유로에 한 보따리씩 파는 걸 보고 놀랐고, 통조림 체리와는 차원이 다른 향과 맛에 두 번 놀랐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후로는 코로나가 터지기 전까지 중국에 있을 때 제일 자주 먹었다. 

 



  한국에서 소확행이 한창 유행할 때, 나는 중국에서 '체리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중국어로는 '처리즈 즈요우'. '체리자유'란 비싼 수입산 생체리를 고민 없이 사 먹을 수 있는 자유를 말한다. 이어서 '싱바커(스타벅스) 즈요우'라던가 '쫜처(고급택시) 즈요우'등의 신조어가 뒤따라 등장했다. 먹고 싶은 걸 먹고, 사고 싶은 걸 사면서 마음 한 켠으로 계산기를 두드리지 않아도 되는, 그런 자유.

 베이징에 사는 내내 나는 집 근처 백화점 지하의 유기농 마트에서 장을 봤다. 주로 훨씬 싼 값에 신선한 야채를 살 수 있는 재래시장에는 단 한 번도 가지 않았다. 택시도 쫜처(한자로는 전차, '전용차'라는 뜻으로, 슈트 입은 기사가 모는 고급택시를 뜻한다)만 타고 주말이면 대륙을 가로질러 여행도 자주 다녔다. 


 중국에서 나는 그 모든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었기에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체리를 


종종 사다 먹었다. 


 월세 3백만 원짜리 집에 살면서 수입산 체리를 사 먹고 양복 입은 기사님이 모는 벤츠나 BMW 택시만 타고 다니면서 나는 때때로 비참한 기분은 떨칠 수 없었다. 중국인들도 먹기 힘든 고급 호텔 중식당에 수시로 드나들고, 중국 젊은이들이 누리지 못한다는 체리자유, 스벅자유, 여행자유, 택시자유 등등 그 모든 것들을 누리면서도 나는 끝끝내 자유롭지 못했다.

 누리던 모든 것 중 진정 내 것이 없어서였을까. 내 명의의 집이 있었으면, 자차가 있었다면 좀 더 자유로웠을까. 


설사 정말 그 모든 것들이 '내 것'이었다 한들 행복했을까. 

 내가 원하는 자유는 훨씬 사소했다.

 못생긴 소파를 버릴 수 있는 자유, 가고 싶은 곳에 가고 떠나고 싶을 때 떠날 수 있는 자유, 검열당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내가 하는 말이 저 중국인에게 해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었다. 중국어 실력이 아무리 늘어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할 수는 없었다. 

 내가 원하는 자유에는 돈이 필요하지 않았다. 


사고 싶은 걸 사고 쓰고 싶은 만큼 돈을 쓸 수 있는 자유는 사실 자유라기보다 '위시리스트'에 가깝다. 경제적 자유는 진짜 자유라기보다 경제적 '능력'이라 해야 맞다. 

돈은 마치 공부와 같다. 공부를 왜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나의 가능성과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라는 대답만큼 적절한 반응이 없다. 실제로 대뇌 발달에도 영향을 미치니까. 돈도 마찬가지다. 자본이 많으면 가능성도 넓어진다. 자본주의 시대에서는 자본도 능력이다.

 하지만 자본의 '자(資)'자유의 '자(自)'가 아니다.

 공부는 일종의 수단일 뿐 공부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듯, 돈도 돈 자체로 목적이 되어서는 방황하게 된다. 현실과 제일 거리가 멀어 보이는 양자역학이니 열역학 제2법칙이니 하는 연구에도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우주의 법칙을 밝힌다는 본래 목적이 따로 있다. 

 그러나 학창 시절 내내 성적만이 목표인 삶을 살아온 사람에게 돈이 목적이 아니라는 설득은 먹히기 어렵다. 중국의 젊은이들은 목적과 수단이 도치된 삶을 살아왔고, 나이 든 이들은 창피했던 지난날의 가난을 숨겨 줄 반짝반짝한 신중국에 매료되었다. 

 자유와 행복은 서로 관계가 깊기는 하지만 동의어는 아니다. 

 자유롭지 못해도 행복할 수도 있고, 한껏 자유롭지만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 일본에서 처음 등장한 유행어인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 평일 점심시간 그 짧은 틈에 따스하게 쏟아지는 햇살을 만끽하며 향기로운 커피 한 잔 하는 행복이, 대륙에서는 고민 없이 돈 쓸 수 있는 자유로 번역되는 걸 보면서 생각했다.

 홍콩사태를 이해하지 못할 만 하구나, 하고.


 홍콩이 자유를 부르짖을 때, 대륙은 냉담한 눈빛으로 말했다. 아주 배가 불렀구나, 뭘 모르는 소리를 하는구나, 왜 엄한 소란을 피우지? 

 돈이 조금이라도 더 있으면 그만큼 더 행복할 거라는 착각, 나의 불행이 소유하지 못한 데에서 온다는 근시안은 분명 젊은 사람에게 더 어울리는 태도이기는 하다. 중국이 아니어도 소비의 늪은 어디에나 도사리고 있는 법이다.

 다만 입으로는 '중국특색사회주의'를 부르짖으며 손으로는 체리자유를 붙잡으려는 허우적거림은 아무래도 위태로워 보이는 것이다.

 지금은 얼마나 자유롭냐고 묻는다면

비루한 고깃덩어리는 서늘한 시멘트 네모 안에 갇히고
네모는 먼지폭풍 속에
먼지는 대도시에
대도시는 대륙에

그렇게 갇힌 채 끙끙 앓던 때와는 비할 바 없이 자유롭다.

 한국에 돌아와 편해졌느냐면,

 정가 다 주고 사면 손해인 것 같고, '마감세일'로 사지 않으면 손해인 것 같고, 쿠폰 떨어지면 다음 달까지 기다렸다가 새벽배송을 주문하고, 택시는 분기별로 한 번 씩 탈까 말까 하지만, 편한 것 같기는 하다.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글쎄,

 낼모레 열릴 대단지 아파트 청약을 떨어질 걸 알면서도 굳이 넣어야 하나 고민이고, 글 쓰는 실력이 도무지 늘지를 않아서 걱정이고, 이대로 적당히 살아도 되나 불안한데 몸은 벌써 조금씩 여기저기 삐그덕 거리는데, 오늘도 행복해!라고 싱글벙글 외칠 맘은 들지 않는다.


 자유가 행복을 보장해주지는 않으니까. 


햇살 한 점 없는 하루지만 오늘도 커피는 좀 마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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