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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제이 Jul 05. 2021

내 인생의 수많은 A에게

나는 그대가 없어도 괜찮습니다

 관심과 애정, 그리고 간섭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사람들이 하는 말은 언제나 비슷비슷하다. 나도 조심스럽다, 어렵게 말 꺼내는 거다, 쉽지 않다, 등등.


 어렸을 땐 순진하게도 그 많은 A들의 그 많은 변명들을 참 쉽게 믿었다.


 눈치 보여서 무슨 말을 못 하겠다는 사람 치고 진.짜. 말 안 하는 사람 못 봤다. 이제는 <조심스럽다>는 말 앞 뒤로 "너 때문에" "내가" "힘들다"는 단어들이 숨어 있음을 잘 안다. "내가"에서 드러나듯 힘들다는 건 결국 자기중심적인 판단이다. 당연히 '조심스럽게' 하는 말들 뒤에 따라오는 문장도 자기 자신을 위한 내용이다. 

 '널 위해 하는 소리' 치고 정.말. 날 위한 얘기는 찾기 어려워서,


네, 나는 그대가 없어도 괜찮습니다.


  A들의 언어는 비슷하게 시작하고 비슷하게 끝난다. 

 혹시라도 네가 곡해할까 봐, 네가 워낙 예민하니까, 반대로 너니까 내가 믿고 말할 수 있다는 식이다. A의 믿음에 부응하려면 기분 나빠해서는 안 된다. 또는 예민한 사람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참고 듣고 있어야 한다. 이 말 뒤에는 항상 현장에 없는 B의 얘기가 따라오기 때문이다.

 B는 정신상태가 너무 나약하더라, 잘하더라, 못 하더라, 이렇더라, 저렇더라.

 A가 자주 구사하던 방식의 언어가 내 입에서 튀어나왔을 때 깨달았다. 직접 구사해보니 알 수 있었다. 얼마나 유용한 수단인지. 

https://unsplash.com/photos/zw07kVDaHPw

  A의 도구들은 편리하기 그지없다. 

 모든 원인은 상대에게 있다. 반대로 A는 그런 상대를 배려하고 이해하는 도덕적 우위에 있다. 저 사람은 이렇고 이 사람은 저렇다고 상대를 정의한다. 말이 좋아 '정의'지, 실상은 가치평가가 반영되어 있다. 듣는 사람도 은연중에 그 '가치'를 느낀다. 결국 보다 높은 가치의 인간으로 남고 싶은 마음에, 가치 없는 인간이 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착한' 사람이 되고자 A의 말을 듣는다. 

 A의 말은 거절하기 어렵다. 이미 프레임을 잡아 놓았으므로, A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소심한 사람, 그릇이 부족한 사람, 자칫 더 나아가면 예의 없는 사람이 된다. 경계는 A가 먼저 넘는데 오히려 거절하는 사람의 인간성이 의심받는다. A는 나름의 노력을 다 한 사람으로 남은 채. 

 

 A는 예의와 무례의 경계를 넘나 든다기보다, 가스라이팅의 경계를 밟고 선 것에 가깝다.

 

 내가 A의 언어를 주워 입었던 순간은 대개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거절당하기 싫으니 거절하기 어려운 상황을 미리 만들어버리는 식이다. 그 공식은 내가 너를 위해 이만큼 희생했다는 직설적인 한탄보다 교묘하게 작동한다. 내 마음을 알아줘서 고맙다고, 너 밖에 없다고, 너만은 역시 알아주리라 믿었다고.

  관계에서 보다 우위를 점하고 싶을 때에도 A의 언어는 유용했다. 상대에게 '착하다'는 굴레를 채워 놓고 좌지우지하고 싶은 욕망이 들 때도 A에 빙의하고는 했다. 나 자신은 안전지대에 머물며 상대를 판단하고 지시를 내렸다. 그렇게 '착하다'를 남발하고 나서야 그동안 내가 들었던 칭찬들이 떠올랐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만, 고래는 인간을 즐겁게 하기 위한 존재가 아니다.

 춤추고 공중제비를 돌면서 받는 박수갈채보다, 잘했다고 던져주는 정어리보다, 먼바다의 자유가 고래에게는 더 절실하다. 아무리 예뻐하고 배불리 떠먹여 주고 돌봐줘 봤자, 며칠 굶고 춥더라도 망망대해에서 누리는 자유가 더 달다. 


 A의 관심이 없더라도 고래는 알아서 잘 살 것이다.


 '잘' 산다는 게 무병장수의 의미는 아닐 수 있다. 몰상식한 사람들이 버리고 간 그물에 걸려 지느러미를 잃을 수도 있고, 떠내려 온 플라스틱을 잔뜩 주워 먹고 끙끙 앓다 죽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단 하루라도 누군가의 볼거리가 아닌 고래 자신으로 남을 수만 있다면, 고래 스스로는 '잘 살았다'라고 판단할 것이다. 


 나이가 들고 경험이 늘어나면서 언제부터인가 사육자의 도구들이 그렇게 편리하다. 상대가 경험하지 못한 영역을 근거로 우월감을 충족할 수도 있고, 인자하고 사려 깊은 모습만 남길 수도 있다. 너도 나이 들어봐라, 하던 나이 핑계가 그러하고, 이게 다 당신을 위하는 마음이었다는 변명이 그러하다.

 내가 따라 했던 A의 언어들은 한때 A가 나에게 그러했듯이 내 곁의 이들을 갉아먹고 있었다. A의 입장이 되고 나자, 그들의 자기만족을 위해 나의 자아를 희생시킬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너도 나이 들어보라는 말이 수많은 A들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였다면, 나이 들기를 잘한 것 같다. 내가 사는 내 인생, A들에게 휘둘릴 필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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