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을 치고 친구와 둘이 처음으로 외식을 간 곳은 순대국밥 집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3학년 담임선생님들이 모여 반주를 하고 계신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우리 반 담임 선생님과 눈이 딱 마주쳤다. 곰돌이 푸를 닮은 30대 후반의 수학선생님이다. 무서웠지만, 수업을 워낙 열정적으로 하시는 터라 학생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다.
"어? 정은아~ 너네가 여기 무슨 일이고. 여고생이 올 데는 아닌데. 여기 맛있으니까 잘 묵고 가레이."
이미 약간 상기된 얼굴의 담임 선생님은 나를 보며 반갑게 인사해 주셨다.
이때가 아마도 내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아저씨를 처음 마주한 때였을 것이다.
나는 약간 팔자로 걷고, 예쁜 가방보다 성능이 좋은 기계를 좋아한다. 첫 만남에서 햄버거 가게와 국밥집 중에 어떤 가게가 좋은지 물어온다면 단연 국밥집이다. 아침밥에는 정갈한 백반이 제일인 것처럼 말이다. 어릴 때부터 가장 좋아하던 과목은 과학과 수학이었다. 달달한 로맨스 영화보다 SF, 판타지, 액션을 좋아했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이 가장 좋아하는 곳은 학교 앞 팬시점이었다. 여고 앞 작은 팬시점은 예쁘고 반짝이는 물건들이 빼곡하게 진열되어 있었고, 구경하는 아이들로 가득 차 있었다. 당시 한 달 용돈이 2만 원 정도였는데, 그와 맞먹는 가격의 일제 캐릭터 샤프, 3만 원이 넘는 헬로키티 실내화 등을 보며 많은 아이들이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지금은 잡화점과 소품점을 좋아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런 것에 상당히 무관심했다. 예쁘고 귀여운 것을 좋아하는 내 친구들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쳐다보기만 했다. 그렇다고 내가 물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만약 나에게 돈의 여유가 있다면 항상 쓰던 제도 1000 샤프를 제도 5000 샤프로 바꿔볼까 하는 생각은 있었다. 확실히 좋은 샤프가 묵직한 매력 있었다.
친구들은 한 번씩 나의 말투를 아저씨 같다고 놀리곤 했는데 정말 가끔 있는 일이었다. 여중 여고를 다니면서 무용을 배우고, 항상 치마 교복을 입고 다니니 나는 그냥 심플함을 추구하는 여학생이었다. 내 안의 아저씨가 불쑥불쑥 올라오는 일은 별로 없었다.
어쩌다 한 번씩 나타나던 내면 아저씨는 공대에 입학하고 아주 물을 만난 듯이 습관적으로 나타났다. 새로 사귄 친구들은 대부분 마음속에 아저씨 하나쯤은 있는 사람들이었다. 선배들의 어처구니없는 아재 개그도 너무 웃겼다. 최근에 꽂혀있는 게임에 대해서 한참 수다를 떨 수도 있었고, 그러다 배고프면 학교 앞 백반집에 밥을 먹으러 갔다.
나를 귀엽다고 말해준 최초의 기억은 불행하게도 첫 남자 친구에게 차일 때였다. 그 이상한 사람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니 사귀기 전에 엄청 애교 많을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더라. 처음 만날 때는 귀여워 보였는데."
아, 내가 귀여워 보이는구나.
그런데 그 말을 듣고 엄청 울었다. 나쁜 놈.
'니가 멋대로 내가 귀엽다고 상상했잖아! 내 속은 아저씬데, 니가 왜 멋대로 귀엽다고 정하느냐고!"
그 이후 내 마음속 아저씨는 점점 뿌리가 깊어져 아름드리나무가 되었다. 친구들의 슬픈 이야기는 소주 한잔 기울이며 같이 울어주고, 후배들에게는 '라테는 말이야'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회사 선배들의 옛날이야기에는 눈을 반짝이며 빠져들었다.
그러다 최근에 들어서 귀엽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되었다. 나의 글에 대해서 말이다. 글쓰기 모임을 참여하면서 다양한 사람들 앞에서 내가 나에 대해 쓴 글을 주 1회씩 읽게 되었다. "정은님의 글은 따뜻해요.", "이 부분의 문장은 귀엽고 사랑스러워요.", "글 속에 특유의 소녀감성이 인상 깊어요." 같은 감사한 이야기들을 많이 듣게 되었다.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는 말들이지만 들을 때마다 참 마음이 따뜻해지고 행복해진다.
그리고 최근에서야 깨달았다. 어느 노래 가사처럼 내속엔 내가 너무도 많다. 뿌리 깊은 아저씨도 있고, 예쁜 글을 좋아하는 소녀도 있고, 일 욕심이 엄청난 스타트업 창업 멤버도 있다. 외로움을 많이 타는 어린아이도 있고, 주말에는 하염없이 누워있고 싶은 고양이도 있으며,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반가워서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도 있다. 그 모든 것이 다 나였다. 지금에 와서야 내 안의 아저씨를 마주할 때처럼 하나씩 마주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나를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는 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