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이것을 어렴풋이 알게 된 것은 10년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존재를 인정한 것도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오늘에서야 정확히 명명하였기 때문에, 그동안은 그저 단순히 저의 습관에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했어요. 이제는 이것을 '습관적 동의 증후군'이라고 부르기로 하겠습니다. 제가 이렇게 부르는 이유는 다양한 측면에서 이상한 증상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부터 동의를 잘하는 습관은 저에게 많은 이익을 주었습니다. 착한 딸이 될 수 있었고, 착한 학생이 될 수 있었습니다. 교우관계도 좋고, 회사에서도 눈치 빠른 사원이 되었죠. 저는 단순히 "맞아요!"라고 맞장구를 쳤을 뿐인데 말입니다.
제가 이것을 어렴풋이 눈치채기 시작한 10년 전으로 돌아가 볼게요. 좋은 회사에 다니면서 열심히 일하고, 가정이 평온하며 일찍 결혼한 제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이야기에 항상 웃으면서 응대하고, 합의를 이루기 위해서 노력했어요. 사람들은 나에게 항상 평온해 보이고, 밝아 보여서 좋다고 했습니다. 저도 그런 저의 모습을 좋아했어요.
가끔은 불편하고 힘든 생각이 들었지만, 결국은 이 모든 것이 잘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자주 영화 '예스맨'을 떠올렸어요. 처음 주인공이 매 순간 "예스"를 하겠다고 다짐했을 때, 엉망진창인 하루를 보내게 되죠. 하지만 결국에는 행복해지잖아요? 저는 제가 아직 충분히 동의하지 못해서, 또는 마음속 어딘가에는 엉큼한 구석이 있어서 잠시 시행착오를 겪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결국에는 행복해질 테니까요.
제가 단순히 말로만 동의한 것은 아닙니다. 머리와 마음과 행동으로 그것을 옮기려고 했죠. 우선 동의를 하는 저의 습관은 오랜 기간 동안 스며들어 저의 생각과 마음이 되었습니다. 붓에 묻은 물감을 흡수하는 스펀지처럼 다른 사람의 색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세상에는 참 대단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신기한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고, 날카롭고 선명한 시선을 가진 사람도 많아요. 타인의 의견에 습관적으로 동의를 하다 보니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대단해 보이더라고요. 내가 그 요구에 부응하지 못할 때는 참 괴로웠습니다.
저는 타인이 들이미는 붓이 어떤 색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저는 모든 색을 흡수할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가끔은 타인의 비난까지 그대로 동의했습니다. 저의 근본을 흔드는 묵직하고 다듬어지지 않은 말과 행동들에도 "동의합니다. 고치겠습니다."라는 일관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저는 그것이 선한 것이고,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저는 점점 눈치를 채고 있었습니다. 이상한 색이 덕지덕지 엉켜서 말라비틀어진 형상을 한 제 모습을 말이죠. 어릴 적부터 소중히 그려온 밑그림은 보이지 않고, 더 흡수할 용량이 없어 진득한 오수를 뚝뚝 떨어뜨리는 스펀지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소중한 사람들마저 나처럼 더럽힐 순 없어 세상을 떠나야겠다는 생각도 했었습니다.
내 생각도 내 마음도 내가 정할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저는 습관적으로 동의를 했고, 저를 비난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과정을 반복하면서 자주 아프고 괴롭고 힘들었습니다. 아프고 힘들 때면, 나 자신의 나약함을 증오하면서 또다시 저를 괴롭히는 것들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저는 가족들과 친구들의 지지와 사랑 속에서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이런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예전에 저는 이런 관계를 '정서적인 학대'라고 정의했지만, 최근에는 이를 '가스라이팅'이라고 부르더라고요.
저는 이제 맞는 말에 마음껏 동의하는 사람입니다. 습관처럼 "네"가 먼저 나오기도 하지만, 내 마음은 괜찮은지 물어봐 줍니다. 괜찮지 않은 내 마음을 고치려 들거나 비난하는 사람과는 거리를 둡니다. 모든 것에 동의하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들과 더욱 친밀한 관계를 맺습니다. 모든 것에 같은 의견은 아니더라도 서로 이해할 수는 있으니까요.
가끔 그러지 말았어야지 하는 생각을 절대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결국 과거에 내가 최선이라고 생각한 선택들로 오늘의 내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저는 오늘도 최선을 선택하고 살아가고 싶습니다.
습관적 동의 증후군에서 벗어나 진짜 생각과 마음이 통한 선택하면서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