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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은 Feb 12. 2022

나 킥복싱하는 여자야!

2019년이 끝나가는 겨울, 지하철역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체육관의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었다. 세 명의 사람들이 아주 흥겹게 이야기하면서, 나에게 "꼭 운동을 하러 오세요."라고 정감 있게 말을 걸었다. 몸이 아주 다부진 사람들이었다. 전단지를 펴 보았을 때, "2020년 1월 확장 이전, 킥복싱"이라고 적혀 있었다. 

 

마침 운동이 필요하기도 했고, 전단지를 나눠주는 그 무리의 밝은 표정에 끌리기도 해서 다음날 그 도장을 찾았다. 체육관은 오래된 상가 지하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이제 막 공사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생각한 것보다 환하고 깔끔한 느낌이었다. 관장님으로 보이는 키가 크고 험상궂게 생긴 분이 아주 상냥한 목소리로 나를 반겨주었다. 그렇게 나는 킥복싱을 시작하였다. 

 

사실 킥복싱은 '생산성'의 측면에서, 정말이지 나에게 쓸모없는 운동이다. 열심히 한다고 잘할 수도 없고, 잘한다고 해서 어디에 쓸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체육관에서는 30대 후반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험상궂고 자상한 관장님이 나보다 겨우 한살이 많았고, 닌자처럼 발이 빠른 대장 코치님이 나와 동갑이었다. 그리고 어리지만 다부지고 밝은 다른 코치님들과 대부분 20대인 회원들이 있었다. 2년에 걸쳐 다닌 체육관(코로나로 나간 기간은 12개월이지만)에서 만난 언니는 단 2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상당히 킥복싱을 좋아했다.

체육관을 나가는 것만으로도 예쁨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곳의 대부분은 기본적으로 운동신경이 좋았다. 나 같은 몸치가 잘 없다 보니 10살 넘게 어린 친구들이 내가 체육관에 나오는 것만으로도 아주 예뻐했다. 한 달 정도 함께 운동을 다닌 키 크고 운동을 잘하는 잘생긴 남자 후배가 있었는데, 자신에게는 제대로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면서 이 체육관은 별로라고 했다. 그 이야기에 나는 그냥 피식 웃었다.

 

사실 성인이 된 이후로 '쓸모'없는 나를 아주 너그럽게 받아주는 집단에 속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생산을 해야 했다. 그것이 존재만으로도 예쁜 아기들에게는 가능하지만, 어른에게는 불가능하다. 심지어 나 자신에게 조차도. 

 

나는 샌드백을 정말 못 쳤다. 스킬도 부족하겠지만, 코어 근육도 아주 부족하기 때문이다. 코치님이나 다른 사람들은 샌드백을 칠 때도 상당히 멋지다. 무생물인 샌드백조차 불쌍한 지경이다. 그러나 나는 '그 나쁜 X'를 샌드백이라며 마인드 컨트롤을 하고 걷어차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코치님들은 어떤 부분이 문제가 있는지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그리고 내가 제대로 못하고 기운이 빠져 주저앉아버리더라도 잘했다고 격려했다. 그 점이 그동안 내가 해온 많은 운동들과 달랐다. 체중 감량이라던지, 기록이라던지, 타인의 인정과 같은 것들이 필요 없었다. 

한번 더 주먹을 휘둘러야 할 때, 가장 어린 코치님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 한번 더 팔을 뻗어야 강해질 수 있어요!" 

 

킥복싱의 장점은 신기하게도 체육관 밖에서도 동일했다. '나 킥복싱 배워.'라고 말하면 사람들이 멋지다고 말해준다.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그냥 '한다는 것 자체'를 존중한다는 뜻이었다. 다른 종목의 경우에는 '다음에 같이 하자'라는 빈말이 섞인 인사말이 나오고는 하는데, 킥복싱은 그럴 리도 없다. 이 덕분에 나의 부족함을 들킬 위험도 없었다. 정말 생산성이 없어도 눈치 보이지 않는 운동이었다.

 

'생산성'

이 정갈한 단어는 얼마나 성실하게 나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했던가.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랬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엇을 하던 본인에게 남는 것을 하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집단 최면에 걸린 것처럼 '쓸모'가 없으면 안 된다는 강박을 가지고 있다. 무덤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고 말하면서.

 

목디스크로 킥복싱을 쉬고 있는 지금도 가끔 그때가 그립다. 쓸모없어도 괜찮은 나 자신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킥복싱하는 여자야."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던 나 자신이 또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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