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아침의 직장 사무실 분위기는 무겁지만 차분한 분위기이다. 금요일 퇴근 시간이 밝고 가벼운 분위기라면 월요일 아침의 분위기는 특유의 무겁지만 차분한 냄새가 난다. 주말동안 밀려있던 일을 정리하기도 하고 주말 보낸 이야기를 가벼운 주제로 삼아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오늘도 어김없이 찾아온 월요일 아침은 그렇게 우리에게 한주의 시작을 알리는 그런 시간이다. 청량한 아침햇살이 창문의 블라인드를 통해 내 책상위로 드리워져 있었다. 어제 저녁 그렇게 출근하는 것이 두려워 무거운 마음으로 잠이 들었지만 막상 출근하니 일을 하고 있다는 즐거움마저 드는 것은 보면 인생이 흘러가는 대로 꾸역꾸역 살아지는 것 같다.
그때 사무실 여기저기서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 팀장님부터 시작해서 올해 갓 들어온 신입사원까지 모두 핸드폰의 문자를 확인했다. 요즘 같은 시기에 단체문자로 오는 것은 코로나 관련 확진자이거나 회사에서 보내는 소식 알림문자 둘중 하나였다.
문자 내용은 부고와 관련된 알림문자였다. 직원이 많다보니 부고소식은 일주일에 한번정도는 날라오는 흔한 알림이였다. 죽음이라는 것이 인생에 있어서 절대적이고 가장 슬픈 순간이긴 하지만 나와 안면이 없는 직원의 가족의 죽음이라면 아무런 감정이 생기지 않은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한다. 언제나 그랬듯 직원의 이름부터 확인하고 나와 관계없는 사람이면 단지 종료버튼 한번 누르면 끝나는 것이였다. 나는 직원 이름을 확인하고 무심하게 종료버튼을 누르고 하던 일을 마저 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저기서 웅성웅성 거리더니 사무실에서 목소리가 가장 큰 과장님 한분의 목소리가 내 귀에 들어왔다
“이거 뭐야, 옆 부서의 아무개가 죽었다는 얘기잖아”
그 과장님의 놀라는 음성에 다른 사람들의 말 소리까지 집중하게 되었다.
“문자 잘못 온거 아니야. 문자 내용은 아무개가 죽었다는 말인데요”
누군가가 맞장구 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나도 좀 전에 온 문자를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아무개 직원의 이름만 확인했는데
정말로 자세히 보니 사망자가 아무개로 나와있었다. 아무개의 가족이 아니였다.
나는 회사 인트라넷을 켜서 조직도를 클릭했다. 조직도의 이름을 치면 사진이 같이 나와서 누군지를 알 수 있었다.
“아 무 개”
나는 이름을 타이핑하고 모니터상에 올라온 사진을 보았다.
“헉”
평소에 옆사무실에서 늘 보던 선배였다. 노조 활동도 같이 해서 안면이 있을뿐더러 그 선배 성격도 모나지 않아 나에게 늘 반가운 척을 해주신 분이였다.
비록 같은 부서는 아니지만 몇일 전까지 인사를 주고 받았던 사람이 죽었다고 생각하니 나와는 상관이 없는 죽음이라도 충격으로 와 닿았다. 이번 부고소식은 지금 까지와는 달랐다.
몇 몇 직원은 벌써 여기저기 전화를 돌려 부고 소식에 대해 물어보고 있는 중이였다. 같은 부서도 아닌 우리 사무실이 이정도로 충격인데 아무개 선배가 근무했던 옆 부서의 부서원들은 이미 회사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며 한눈에 봐도 심각한 표정으로 무슨 말들을 주고 받고 있었다. 비슷한 나이대의 선배의 죽음은 확실히 나에게도 충격이였다. 솔직히 나에게도 충격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은 그 선배를 더 이상 못본다는 슬픔보다는 나와 비슷한 나이대의 죽음이 주는 현실적인 슬픔들이 더 컸다. 우선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여야하는 아이들을 생각하니 그 안타까움이 더욱 커졌다. 그 안타까움은 나에게 투영되어 마치 우리 아이들이 슬퍼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게 만들었다. 내가 존재하지 않은 우리 가족들. 생각만해도 너무 비극적이고 파괴적이였다. 죽음으로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은 단순히 없어진다는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내가 존재함으로서 의미있던 것들이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남아있는 사람들은 점점 무의미해지는 것들에 대해 슬픔으로밖에 승화 시킬 수 없다는 현실이 더욱 죽음의 잔인함을 느끼게했다.
죽음을 생각할 때 한가지 따라오는 의문점이 있다. 그것은 “왜(why)" 이다. 죽음이라는 문제에 대해 생각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의문을 갖는다 ”왜 죽었을까“ ”어쩌다 죽었을까“
죽음이라는 강력한 현실을 맞이했을 때 사람들은 의례 생각한다. “왜” . 그 사람이 죽음으로써 다가오는 슬픔보다 더 먼저 오는 생각이 “왜”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운명”이라는 대답으로 죽음을 합리화한다.
선배의 죽음에도 많은 “왜” 라는 질문이 던져지고 있었다. 평소에도 밝은 성격에 누구에게나 잘 맞춰주었던 사람이고 경제적인 문제도 없어보였다. 그렇다. 회사생활에서는 그 사람이 성격과 경제적인 능력이 보여지는 전부일 수도 있다. 성격은 회사 생활을 하는 바탕인 것이고 경제적인 능력은 회사를 얼마나 여유롭게 다니고 있냐를 나타내는 것이다. 모든 것이 좋아보였던 그 선배에게 죽음이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더욱이 요절한다는 것은 더욱 많은 의문점을 만들게했다.
“죽었는데 아무도 그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
그렇게 선배의 죽음에 많은 말들이 오고 갈 무렵 죽음의 원인이 어딘가에서 나왔다.
“자살”
우리에게는 갑작스런 소식이지만 그 선배에게는 계획된 죽음이였을 것이다. 죽음을 계획하고 실행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지만 잔인하게도 세상은 계속 물어온다. “왜” “왜 자살했을까”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왜”에 대한 대답은 영원히 들을 수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궁금해한다. “왜”에 대한 대답을 듣고 싶어한다. 그리고 많은 대답들이 생겼다
“가정불화였데. 와이프랑 싸웠다는군”
“우울증 약을 먹고 있었다는데”
이런 대답들이 많들어지면서 선배의 죽음에 대해 하나씩 결론내어지고 있었다.
나역시 여기저기서 생겨나는 대답들을 듣고 그 선배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만약 나도 그동안 우울증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했다면 그 선배같은 선택을 했을까. 그렇다고 지금도 인생에서 느끼는 우울함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는데. 무기력감, 타인의 비난, 만족하지 못한 회사생활, 경제적인 어려움 모든 것들이 해결된 상태가 아닌데, 단지 지금의 마음의 평온이 약에 의존해서 찾은 거라면 만약 약이 떨어져 내 마음을 컨트롤 할 수 없는 지경이 되면 나역시 선배와 같은 선택을 하게 될까. 많은 물음들이 나에게 던져졌다.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져 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난 무기력에 대해 그동안 극복하기 위한 수많은 물음을 던져왔고 그 해답을 찾기위해 노력해왔다. 지금 여기서 마음이 무너지면 또 다시 힘든 싸움을 해야한다.
“그 선배만큼 힘들지 않아서 다행이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해답을 찾았다기 보다는 감사함이 느껴졌다. 그 선배만큼 힘들지 않아서 지금의 가정을 지켜낼 수 있고 나에게 의미있는 것들을 지켜낼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 내가 겪고 있는 마음의 힘듦이 그 선배만큼 힘들지 않은것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안식을 찾을 수 있었다.
“고마워요, 선배, 그리고 부디 계신곳에서는 우울해하지 마세요. 편히 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