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算數) - 나의 가치는 누구의 계산기 속에 있는가

초등학교에 다시 입학하다

by 시가 별빛으로 눕다

화려했던 퇴직 기념패를 거실 한구석에 밀어 넣고 나니, 세상은 거대한 교실로 변해 있었다. 어제까지 '부장님', '작가님'으로 불리던 호칭은 신기루처럼 사라졌고, 나는 이제 막 가나다를 배우는 아이처럼 서툰 발걸음으로 사회라는 교문에 들어섰다. 30년 넘게 치열하게 살아왔건만, 퇴직 후 마주한 이 교실의 공기는 차갑고 낯설기만 하다. 이 학교에서는 명함도, 직위도 통하지 않는다. 오직 '지금 당신의 주머니에 무엇이 들었는가'라는 가혹한 질문만이 등굣길의 나를 가로막는다.

인생의 후반전, 다시 초등학생이 되어 가장 먼저 마주한 과목은 뜻밖에도 '산수'였다. 그것도 사과 두 개를 더하고 빼는 순진한 연산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 가치를 숫자로 치환하는 비정한 계산법이다. 평생을 바쳐 자식을 키우고 일터를 일궈온 나의 시간이, 이제는 자식들의 계산기 위에서 소수점 이하의 가치로 저울질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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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냄새를 쫓는 들개들의 시간, 사랑이 전리품으로 변하는 순간

가장 먼저 나를 아프게 한 것은 자식들의 달라진 코끝이었다. 예전의 부모는 자식에게 비바람을 막아주는 든든한 지붕이자, 언제든 돌아가 쉴 수 있는 너른 마당이었다. 그곳에선 땀 냄새와 흙내음, 사람 사는 구수한 된장국 냄새가 났다. 하지만 퇴직 후, 주머니가 빤해진 부모를 바라보는 자식들의 시선은 사뭇 달라졌다. 그들은 이제 부모의 낡은 어깨에 서린 고단함을 읽지 않는다. 부모의 거친 손마디에 박힌 세월의 흉터는 안중에도 없다. 대신 그들은 부모의 주머니 속에 숨겨진, 혹은 아직 미처 처분하지 못한 ‘돈 냄새’만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부모에게 아직 나누어 줄 살점이 남아있을 때, 집안은 기괴할 정도로 비정상적인 활기가 넘친다. 평소엔 안부 전화 한 통 없던 자식들이 명절도 아닌데 문턱이 닳도록 드나든다. 그들이 내민 손은 온기가 서려 있는 듯하지만, 실상은 부모가 쥔 자산의 농도를 가늠하는 촉수와 같다. 손을 맞잡고 다정하게 웃는 자식의 눈동자 너머로 주판알 튕기는 소리가 들려올 때, 부모의 심장은 얼어붙는다.

"아버지, 그 퇴직금 그냥 통장에 두면 물가 상승률도 못 따라가요. 요즘은 굴려야 돈이 되는 세상이라니까요." "어머니, 친구네는 아파트 증여해서 세금 아꼈다는데, 저희도 미리 준비하는 게 어머니한테도 이득이에요."

그들이 내뱉는 달콤하고 지성적인 조언은 사실 부모의 마지막 보루를 뜯어내기 위한 교묘한 밑작업이다. 그것은 효도가 아니라, 부모라는 거대한 유산을 어떻게 하면 가장 빠르고 효율적으로 분배할 것인가를 논의하는 전략 회의에 가깝다. 그 모습은 흡사 먹잇감을 포착하고 주위를 빙빙 돌며 기회를 엿보는 들개들의 기민한 움직임을 닮아 있다.

돈 냄새가 진동하는 동안 나는 집안의 ‘존경받는 어른’이자 ‘든든한 기둥’으로 한껏 추켜세워진다. 식탁 상석에 앉아 자식들이 바치는 찬사를 듣고 있노라면, 내가 평생 일궈온 삶이 헛되지 않았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환대는 진심 어린 존중이 아니라, 마지막 남은 골수까지 남김없이 빨아먹기 위한 들개들의 처세술에 불과했다. 나는 이 뼈아픈 산수 시간을 통해, 내가 사랑으로 키워낸 생명들이 나를 한 인간이 아닌 ‘현금 인출기’의 잔액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처절하게 배워나간다. 내 자식이 굶주린 들개가 되어 나를 에워싸고 사냥감을 다루듯 눈빛을 번뜩일 때, 부모의 가슴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겨 나간다. 평생을 바쳐 지켜온 울타리가 나를 잡아먹으려는 우리로 변해버린 현실 앞에서, 나는 산수 교과서를 덮고 소리 없이 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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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직장생활을 마치고 2년여 동안 요양시설에서 치매 노인들과 함께 하였고 현재는 AI,인권, 노인의 성,치매 등 다양한 분야에서 강의와 크리에이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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