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주 동안 모든 신경은 연구재단 선정 발표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와중에 장기 출장 교수의 대강수업이 있었고, 학생들의 과제 글을 첨삭해야 하는 바쁜 환경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입니다. 신경을 분산할 수 있어서 말이지요. 의연하게 받아들이자 하면서도 온몸은 예민해져 있었습니다. 며칠 째 앓고 있는 목감기는 약을 먹어도 낫지 않았고, 밤마다 기침은 더 심해졌습니다. 남편과 딸아이들의 불만도 쌓여갔습니다. 온몸으로 긴장과 우울을 드러내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요. 마음 다스리기에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금요일, 오늘 내로 발표를 할 것이라는 정보가 있었습니다. 오전에 재수강반 학생들 강의를 위해 학교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연구과제 선정 유무로 최근 엄망이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많이 지쳐 있음을 우리 가족들은 잘 알 거야. 살다 보면 내 노력과 관계없이 안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일이 다반사이거든. 하지만 그러한 노력들이 쌓이고 쌓이면 나중에 뜻하지 않은 곳에서 빛을 보곤 하지. 우리 가족은 엄망이의 노력을 잘 알기에 결과에 관계없이 항상 응원할 거야. 이러한 아빵이의 마음은 큰딸에게도 작은딸에게도 똑같아. 사랑해.”
가족 단톡방에 남편의 글이 올라왔습니다. 그 순간 울컥하면서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이보다 훌륭한 위로가 있을까요? 저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남편의 배려입니다. 정말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남편 덕분에 말이지요.
“선생님! 발표 났어요. 빨리 확인해 보셔요.”
오후 5시 무렵,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발표를 기다리다 지쳐 외식을 하러 막 나가려는 참이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이 뜨는 순간 발표가 났음을 직감했지요. 이게 뭐라고 정말 떨리더군요. 아이들이 핸드폰으로 들어가 확인을 합니다. 그리고 결과는 ‘예비선정’! 저도 아이들도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아마 아파트 주민들이 모두 놀랐을 겁니다. 엄마의 작은 성취에 아이들도 남편도 진심으로 축하해 줍니다.
동료 교수는 저의 선정을 자기 일처럼 기뻐해 줍니다. 물론 그녀 역시 당당히 선정되었지요. 무려 6년 연속으로. 그녀는 목요일에 항상 만나는 밥친구입니다. 기버(Giver)! 그녀를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단어입니다. 그녀의 손에는 항상 한가득 선물이 들려 있습니다. 대전도 아닌 서울이 집이라 기차를 타고 내려오는 번거로운 상황인데도 말이지요. 고급스러운 쇼핑백 안에 담긴 물건은 다시팩, 커피, 김, 계란 등의 먹거리가 가득합니다. 반전이지요. 식품 회사를 다니는 지인에게 받은 것을 나눠 먹고 싶다고 하면서 극구 가지고 내려옵니다. 그 일이 결코 쉽지 않은 번거로운 일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늘 고맙습니다.
우리는 공감할 부분이 많습니다. 힘든 강사 생활도, 엄마 역할도, 한 주 동안 속상한 일들을 이야기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대학원 시절 조교였던 그녀는 교수님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일도 공부도 멋지게 해내는 친구였습니다. 이후 한동안 아이들 육아를 위해 잠시 학업을 중단했고, 어쩌다 보니 졸업은 제가 더 빨리 하고 말았지요. 그리고 몇 년이 흘러 우연히 강사 휴게실에서 만났을 때, 그녀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당시 연구재단에 선정된 계획서를 참고하라고 보내주었습니다. 그녀는 그 이후 무려 6년 연속 과제에 선정되는 경이로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선생님 덕분이라고. 그러나 이것은 오로지 그녀의 능력입니다. 이제는 가장 의지하는 동료가 되었습니다. 자신이 받은 것을 잊지 않고 챙기는 마음이 그녀의 단아한 외모처럼 아름답습니다.
대상관계 이론가인 길버트는 타인과의 애착은 주로 안전체계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대인관계 상황에서 경쟁-협력을 경험합니다. 이는 모두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합니다.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협력은 안전감, 소속감, 인정받고 있다는 느낌과 관련됩니다. 반면에 경쟁은 권력, 자신의 지위를 방어하기 위한 경계 그리고 보다 우세한 지위를 차지하기 위한 노력과 연관됩니다. 지속적으로 방어체계가 활성화되어야 하는 경쟁적인 상황은 감정 상태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만 안전체계의 경우는 반대가 됩니다.
경쟁은 수직적이고 위계적인 인간관계와 관련되며, 이로 인해 자신과 다른 사람이 지닌 힘과 능력을 비교하게 됩니다. 반면에 협력은 수평적인 인간관계 상황에서 기능합니다. 협력 상황에서는 능력과 자원이 공유되므로, 다른 사람과의 차이는 최소화되고 집단내 사람들과는 서로의 가치를 인정하는 분위기가 조성됩니다.
어찌 보면 그녀와 저는 경쟁관계이기도 합니다. 임용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현실에서 말이지요. 그러나 그녀는 그 경계를 무너뜨리는 마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누구보다 서로를 지지해 주는 협력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 안에서 최고의 안전을 느끼면서 진정으로 서로를 응원합니다. 그녀와 오래도록 함께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이제 저도 Giver로서의 삶을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연구 주제는 매우 흥미로운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융합 연구가 학계와 교육계, 그리고 사회에 기여할 여지는 범위를 한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다고 봅니다.-중략- 계획서의 내용은 체계적이고, 특별한 약점을 찾기 어려운 정도로 잘 정리되었습니다.”
평가의견도 최고의 찬사를 받았습니다.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보여줄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엄마의 작은 도전이 성취로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아이들도 힘든 과정을 잘 견뎌주기를 기도합니다. 정말 행복한 성취경험을 했습니다. 남편이 따라주는 소주 한 잔은 최고의 맛이었습니다.
작은 아이는 중앙대 모의논술을 보았습니다. 온라인으로 접속하여 140여분 동안 3문제를 풀어내야 합니다. 제가 판단하기에는 잘 쓴 것 같은데, 대학 측에서 어떻게 볼 것인지 일단 첨삭 결과를 기다려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또 아주대 측에서 주최하는 모의면접이 있어 대전 컨벤션 센터에 다녀왔습니다. 생기부에 있는 내용에 맞추어 면접을 연습했습니다. 말을 잘하는 편이니 모의면접도 무난하게 잘할 것이라 믿습니다.
큰 아이는 체력관리를 위해 다시 헬스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아이를 데리고 근처 공원에 산책을 나갔습니다. 맛있는 음료수도 한 잔 사서 벤치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합니다. 무한 긍정 에너자이저였는데, 요즘 매사를 부정적으로 보는 듯합니다. 뭐든 시간이 지나면 이루어지더라는 말로 위로를 대신합니다. 바로 이 엄마가 산 증인이라는 말과 함께 말이지요. 길어지는 수험생활에 멘탈 관리를 위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