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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나귀똥 Sep 24. 2021

치앙마이1. 불행한 밤의 전조

2019. 6.22~6.25 치앙마이 (1)

2019년 6월, 치앙마이에 다녀왔습니다.


당시 몸담고 있던 스타트업에는 ‘셧다운 휴가제’라고 해서 1년에 2번 약 10일간 긴 휴가를 다녀올 수 있는 제도가 있었어요. 휴가 앞뒤로 꽤 빡센(!) 날들이 이어지기는 하지만 연차를 쓰지 않고도 긴 휴가 계획을 세울 수 있는 꽤 좋은 제도였습니다. 물론, 전 직원이 함께 해외여행을 가는 며칠을 제외하고 나면 혼자만의 휴식 시간은 절반 정도밖에 남지 않지만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


여름 셧다운 휴가는 6월 말. 저는 한 달 뒤인 7월에 퇴사를 앞두고 있었습니다. 프리랜서 생활을 접고 회사 생활을 시작한 지 1년쯤 되는 시점이었어요.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그렇게까지는 못하겠다, 싶은 뜨거운 1년이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단순히 업무량이 많다거나 신규 서비스를 이끌어야 하는 중압감이 컸다는 건 핑계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이제와 생각하면 스스로가 한없이 부족하다는 걸 깨닫고 지쳐버렸던 것 같습니다.


아등바등 그 시절의 나


2018년 셧다운 휴가 때는 3~40명 안팎의 직원들과 함께 발리 여행을 갔었는데 1년만에 직원수가 배로 늘었습니다. 맘 맞는 동료들과 신나게 즐길 생각에 조금 들뜨기도 했지만 '그만두기로 한 마당에?' 싶은 염치가 발동해 불참하기로 했어요.


게다가 마지막 업무 주간까지 야근이 끊이지 않을 만큼 일이 많았기에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는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기도 했습니다.


그때의 저는 욕심이 참 많았어요. 대표님 기대에 부응하는 우수직원으로 남고 싶었고, 강단 있게 팀을 이끄는 멋진 동료가 되고 싶었습니다. 협업하는 업체와 크리에이터들에게는 배려심 있고 나이스 한 직원이 되고싶어, 매 순간 필요 이상으로 무리를 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는데 말이에요.


한 3~4일 아무 말 하지 않고 걸을 수 있는 것. 카톡과 메일함을 열어보지 않고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저의 마지막 셧다운 휴가는 충분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혼자만의 여행지.

남들은 무려 한 달씩이나 살고 온다는 그곳, 치앙마이를 찾았습니다.


생각보다 무서웠던 치앙마이의 밤


치앙마이의 밤

밤에 도착항 치앙마이의 첫인상은 '매우 깜깜하다'였습니다. 생각보다 더 작은 공항 규모에 ‘일본 소도시에 온 것 같다!’라는 인상도 받았어요.


워낙 짧은 일정인데다가 치밀한 계획을 세울 만큼 여유롭지도 못해서 사실상 숙소를 예약한 것 말고는 아무런 준비도. 정보도 없었습니다.


방콕과 비슷하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당시의 저는 여행 갈 틈만 나면 방콕을 찾았어요) 숙소로 향할 그랩을 불러도 좀처럼 잡히지 않아서,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TAXI]라고 쓰여있는 곳을 찾아가 어렵게 택시를 타긴 탔는데 그랩 자가용에 익숙해진 탓인지 진짜 택시 다운 택시가 도리어 낯설었어요. 어딜 가든 환했던 방콕의 밤과 달리 어둡고 조용한 바깥 풍경을 살피다 보니 겁이 났습니다.


마침내 도착한 숙소 (밤에 본 숙소는 더 을씨년스러웠다)


불행한 밤의 전조

숙소는 꽤 깊은 곳에 있었습니다. 숙소 사이트를 보다 적당한 위치와 가격, 특히 환한 빛이 들어오는 사진이 마음에 들어 미리 결제한 숙소였는데 건물 외경은 무척이나 을씨년스러웠습니다. (개구리 소리 등의 음향효과까지...!)


“익스 큐즈미!”를 여러번 외쳐도 프런트는 조용했습니다. 최선을 다해 목소리를 높이다보니 허름한 차림새의 한 청년이 나왔어요. 어렵게 체크인을 한 후 그를 뒤따라 이동했습니다.


숙소는 기숙사를 개조한 것 같은 복도식 건물이었는데 사람이 있기는 한 건지 아주아주 조용했어요.


배정받은 룸의 문을 열자. 어둑한 기운이 훅, 하고 몰려왔습니다.


좀처럼 실망한 기색을 숨길 수 없었어요 ㅜㅜ 그 동안 이보다 더 허름한 도미토리 룸에서 묵은 적도 있었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게스트하우스 수준’을 기대했던 게 아니었거든요.

‘사진빨에 속았다'는 말이 딱이었습니다.


문을 열자마자 느껴지는 뜨겁고 습한 기운에 가방을 들고 올라와준 직원이 재빨리 에어컨 리모콘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에어컨이 작동되지 않았어요.


불행한 밤의 전조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 저 방만 그런 걸거야!' 하고 희망을 가져보았지만 옮긴 방도 마찬가지로 어둡고 눅눅했어요.


그래도 날이 밝으면 사이트에서 보았던 그 환한 풍경이 펼쳐질거라는 기대를 품고 오늘은 일단 자야겠다, 싶었습니다.


그렇게 샤워용품을 꺼내어 욕실로 들어간 순간.


'호다다닥'


무언가 움직이는 낌새가 느껴졌어요.


‘꺄악!’(호들갑)


남들은 도마뱀을 귀엽게도 여긴다는데 저는 좀처럼 그럴 수 없었습니다. (도마 '뱀'이잖아요) 프런트로 내려가 다시 청년을 찾았습니다.


파파고를 열어 ‘도마뱀이 방에 있어요!’를 치고 화면을 보여줬어요. 청년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서랍장에서 꺼낸 커다란 빗자루를 들고 ‘나만 믿고 따라와’하는 든든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청년은 믿음직스럽지 못했어요. 내 눈에는 잘만 보이는 도마뱀을 자꾸만 놓치더니 '나비야~’하고 고양이를 부르는 것처럼 여유롭게 도마뱀을 부르며 쫓는 시늉만 보였습니다. 꼭 저를 놀리는 것 같았어요 ㅠㅠ


한편으로는 늦은 시각, 도마뱀을 잡아달라고 징징대는 진상손님이 된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빗자루로 휘이휘이, 시늉만 하던 청년이 어깨를 으쓱 올리며 “난 최선을 다했지만 못 잡겠는걸?” 하는 무언의 메시지를 주었습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한 후 청년을 내보냈지만 좀처럼 마음이 놓이지 않았어요. 한참을 고민하다 다시 프런트로 가서 가능하면 방을 옮겨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저도 참 진상이네요)


새로운 객실에서도 어쩌면 숨어 있을지 모를(?) 도마뱀을 한참 동안 찾아 나섰습니다. 다행히 도마뱀이 보이지 않아 서둘러 샤워를 끝냈어요. 그러고는 다급히 아고다를 열어 다음날 투숙할 수 있는 새로운 숙소를 찾아나섰습니다.


떠나기 전 기념 사진

새로운 숙소에 예약한 후 ‘또한 재미있는 에피소드로 남겠지?’ 하고 위로하려했지만, 발코니의 작은 움직임에도 소스라치게 놀랄만큼 저의 긴장상태는 최고조였습니다.


어째서인지 나무로 된 욕실 문과 방문도 에어컨 바람에 끼익~ 끼익~ 흔들렸고, 몸도 막 가려운 것 같았어요.


그래도 새로운 숙소를 예약한 게 어디냐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평소라면 상상하지 못할) 스르르.


만화 속 한 컷처럼 잠들어버렸습니다.

(결론: 피로가 공포를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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