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PD의 맛있는 이야기
EBS 세계테마기행 촬영차 스페인에 다녀왔습니다. 스페인 미식기행이란 콘셉트로 3주간 지중해와 오렌지의 고장 발렌시아와 돈키호테의 고향인 라 만차 지역, 대서양과 마주한 북부 갈리시아까지. 스페인 중남부와 북서부의 다양한 맛을 만난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스페인도 지역별로 확실한 음식의 특징을 가지고 있더군요. 지중해 연안의 발렌시아 지역은 다양한 해산물과 쌀로 유명합니다. 스페인 쌀 생산량의 대부분이 발렌시아 지역에서 경작됩니다. 풍부한 쌀 문화의 산물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빠에야입니다. 발렌시아의 빠에야 자부심은 대단하더군요. 천연 소금이 풍부한 발렌시아는 염장 음식도 발달을 했습니다. 염장한 참치와 참치알(어란)의 크기와 맛은 대단하더군요.
돈키호테와 산초의 고장인 라 만차는 스페인 중남부의 내륙 지방입니다. 광활한 초록 평원이 가슴에 시원함과 적막함을 동시에 선사하죠. 언덕에 서서 라 만차의 평원을 바라보고 있으면 왜 돈키호테가 기약 없는 여행을 시작했는지 알 것도 같더군요. 라 만차의 맛은 소박하고 따스합니다. 피망과 고기를 푹 끓여 만든 피스토는 언제나 그리울 것 같네요.
북부 갈리시아의 대서양은 장쾌합니다. 거친 파도가 바위에 부딪쳐 뿜어내는 흰색 포말의 울림은 강렬합니다. 갈리시아 지역 작은 마을인 묵시아의 바다에 '죽음의 해안'이란 명칭이 붙을 만한 이유가 충분합니다. 수많은 배들을 좌초시킨 '죽음의 해안'은 역설적으로 강한 생명의 맛을 품고 있었습니다. 무게 40kg, 길이 1m 50cm를 넘나드는 거대한 묵시아 붕장어의 숯불구이 맛은 대단했습니다. 맑지만 진한 모순된 맛이 두툼한 붕장어 살과 풍부한 육즙 안에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강한 파도에 맞서 바위에 뿌리내린 거북손은 속살은 놀라웠습니다. 대서양 바다의 맛이라는 모호한 수사 이외에 다른 표현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깊은 맛이었습니다.
스페인 음식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바로 올리브유, 마늘, 그리고 피멘토(피망 가루)입니다. 한식이 참기름, 들기름을 애정하듯이 스페인의 모든 음식은 올리브유로 마무리됩니다. 질 좋은 올리브유로 마무리된 스페인의 맛은 부드럽습니다. 익힌 요리는 대부분 마늘이 첨가되고, 피멘토로 맛과 색을 더합니다. 피망을 말린 후 훈제하여 가루로 낸 피멘토는 한국의 고춧가루를 연상시킵니다. 연한 매운맛에 강렬한 붉은색을 갖고 있죠. 마늘에 빨간 피멘토 그리고 스페인의 천일염까지 더해지니 딱히 한식이 생각나진 않았습니다. 단 한 끼도 한식은커녕 한국 여행자들의 필수품이라는 컵라면도 먹지 않았는데도요. 그만큼 스페인 음식이 한국인의 입맛에 맞았던 거죠. 2주 동안은요.
촬영 3주 차에 접어드니 스멀스멀 한식이 떠오르더군요. 한식 DNA는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소갈비에 싱싱한 활어회 같은 대단한 음식이 생각났던 건 아니었습니다. 따끈한 김이 올라오는 하얀 쌀밥과 매콤 칼칼한 찌개 국물에 젓갈, 장조림, 멸치볶음 같은 짭조름한 밑반찬들. 맞아요. 그렇고 그런, 흔하디 흔한 백반 한 상. 경기도 안산 선부동의 좁은 골목 어귀 '큰 바위 식당'이 차려주는 따뜻한 일상의 맛이 그리워진 거죠.
귀국 다음날 동네의 보석 같은 밥집인 큰 바위 식당을 찾았습니다.
"제육볶음 하나, 오징어볶음 하나, 동태찌개 하나하고 순두부찌개도요". 먹는 사람은 아들과 저 둘뿐.
3주간 눌려있던 백반 식탐이 폭발한 거죠. 스페인 '죽음의 해안'의 파도처럼 호쾌하게 주문을 했습니다.
테이블 가득 밑반찬이 깔립니다. 돼지고기 장조림, 멸치볶음, 마늘종볶음, 콩자반, 열무김치. 반찬 하나하나 허투루 인 것이 없습니다. 큰 바위 식당 최고의 덕목은 반찬입니다. 따스한 온기가 반찬 맛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정성 어린 반찬이 총 출동하고도 순두부찌개 일 인분 가격이 8,000원입니다.
갓 지은 따끈한 흰쌀밥에 찌개와 볶음 요리를 내주시네요. 흰쌀밥에 양념 어린 반찬들을 올려 입에 넣으니 행복감이 밀려옵니다. 따끈히 볶아 낸 마늘종에 밥 한 술, 장조림에 또 한 술, 칼칼한 동태찌개 국물에 콩자반을 곁들여 또 한 술. 큰 바위 식당에선 밥을 아껴 먹게 됩니다. 간이 좋은 반찬들 덕분에 밥 한 공기가 뚝딱이거든요. 뻔한 반찬들이 뻔하지 않은 포만감. 평범하기에 편안한 순간입니다. 물론 이 순간의 배경엔 사장님의 맛깔스러운 손맛이 있지요.
큰 바위 식당은 몇 년 전에 아내가 알려준 곳입니다. 아내는 동네 단골 한의원 의사 선생님에게 정보를 얻었고요. 식당 부근 상가에서 일하시는 분들에겐 이미 유명세를 얻은 동네 밥집을 저는 안산에 산지 20여 년 만에 알게 된 겁니다. 서울 여의도, 광화문, 상암동을 오가면서 유명 맛집들 쫓아다니던 시절엔 전혀 몰랐습니다. 회사를 떠나 프리랜서로 독립을 하고 나니 가까운 곳에 이토록 소중한 맛집이 있음을 보게 된 거죠. 큰 바위 식당뿐이 아닙니다. 전국구 유명 순댓국에 비해 전혀 뒤지지 않는 동네의 '대대로 순대'도 20년 만에 먹어 보았고, 매주 금요일마다 아파트 단지 앞에 오는 곱창 포장마차도 이제야 단골이 되었습니다. 퇴사 전에는 관심을 갖지 못했던 곳이었습니다. 내 일상과 공간 속 귀한 맛집들을 지금에야 알게 된 거죠. 떠나니 보였던 겁니다.
저란 사람이 얄팍해서인지 익숙해지니 동네의 맛집의 소중함을 또 잊어버리더군요. 늘 곁에 있으니까요. 그걸 3주간의 스페인 촬영이 다시 일깨워줬습니다. 역시나 떠나니 보였던 거죠. 긴 연휴가 시작됩니다. 답답한 밥벌이의 일상에서 잠시 떠날 수 있는 황금 같은 시간이죠. 여유의 시간, 잠시만 주위를 둘러보세요. 의외로 가까운 곳에 귀한 무엇이 있을 수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