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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연 PD Jul 23. 2024

가볍게, 호호

사는게 뭐, 다, 막걸리지

“가볍게  한 잔 하자. 거칠지 않게 가볍게”

몸은 힘든데 술은 당기는, 안 마셔도 그만이지만 지나치면 섭섭한 그런 날은 ‘가볍게 한 잔‘이다. 문제는 어떻게 마셔야 가볍게 한 잔인지 모른다는 점인데.. 술독에 빠지기 위한 구실로 던진 말인지 '가볍게 한 잔‘의 끝은 대부분 '무거운 숙취‘로 마무리되기 마련이다. 뭐 그게 술꾼의 라이프 스타일이기도 하지만. 후회하고 마시고, 후회하며 마시고, 후회되니 또 마시는 술꾼도 사람인지라, 술에 빠져 허우적 되지 않고 여유롭게 술을 리드하고 싶은 헛된 욕망에 가끔은 사로잡힌다. 스스로가 주류 트렌드의 리더가 되어 잔잔하게 한 잔을 음미하면서 사색에 잠겨 본다. 키스하듯 가볍게 입술을 적신다. 세련된 내 모습에 취한 건지 술에 취한 건지 알 수가 없다. 때마침 라디오에서 흐르는 조니 미첼의 목소리가 나를 더 젖게 만든다.

Rows and flows of angel hair

And ice cream castles in the air

And feather canyons everywhere

I’ve looked at clouds that way


천사 머리카락처럼 줄지어 흐르고

하늘에 있는 아이스크림 성

그리고 어디에나 있을까? 깃털로 된 협곡들

나는 구름을 그렇게 바라봤어. (조니 미첼 ‘Both Sides Now’ 중에서)


술이 아니라 멋에 취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 이 녀석을 추천해 본다. 말 그대로, 가볍게 한 잔 하기 좋은, 호호다.

호호(생막걸리)

알코올 : 9도

재료명 : 정제수, 찹쌀, 멥쌀, 단호박, 누룩


선희10으로 큰 실망을 마셨던(개인적 경험이다) 충주 중원당의 신제품 막걸리다. 빛깔이 참 곱다. 단호박으로 색과 맛을 더했다고 하는 여타 첨가물보다는 신뢰가 간다. 오렌지를 갈아 넣어 이 맛도 저 맛도 아니었던 선희10의 반복일지, 새로운 술의 만남일지. 마셔보면 금방 알 일이다. 제목 참 심플하다. 호호.


첫 잔

선희 10의 업그레이드 버전. 달긴 단데, 제법 시큼하다. 제법 쌉싸래한 산미가  혀를 보듬는다. 술맛과는 다른 오렌지 껍질을 씹었을 때 느낄 법한 쌉싸름한 산미다. 근데 제법 어울린다. 딱 떨어지게 ‘좋은데!’라는 느낌표는 아니지만, ‘어? 뭐지 이건?’이란 호기심은 붙는다.


둘째 잔

숙성된 참외의 달큼한 향이 있다. 탄산은 희미하다. 맑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걸쭉하지도 않다. 9도에 걸맞은 보드라운 농도다. 멥쌀로 드라이한 풍미를 잡고, 찹쌀로 단맛을 잡았다. 단호박은 해바라기의 노란빛으로  술을 예쁘게 물들였다. 누룩향은 없고, 쌉싸래한 산미가 여전히 술맛을 리드한다. 예쁘게 뽑은 노란색 술빛에 흔한 단맛으로 주조하지 않음이 참 좋다.


중원당 홈페이지를 보면 제품 설명이 아래와 같이 나와있다.

‘밑술은 구멍떡, 덧술은 고두밥에 단호박을 넣어 빚은 술로, 저온에서 100일 동안 발효, 숙성시킵니다'

위 말에서 흥미로운 단어가 하나 보인다. ‘구멍떡’이다. 술을 빚을 때 쌀을 다루는 방법은 크게 4가지다. 고두밥으로 찌거나, 쌀가루로 만들어 죽이나 범벅을 만드는 경우, 쌀가루를 쪄서 백설기 형태의 떡으로 만든 후 으깨어 누룩을 혼합하는 방법이다. 구멍떡은 백설기의 변형된 형태로, 도넛 형태로 떡을 빚은 후 물에 삶고 으깬 후 곱게 가루를 낸 누룩을 혼합하여 술을 빚는데 보통 힘든 방식이 아니다. 구멍떡을 만드느라 번거롭고, 삶느라 덥고, 으깨느라 손목 아파 선택을 잘 안 하는 방식이다.  그럼에도 구멍떡으로 막걸리를 빚을 때는 이유가 있다. 단맛이다. 가급적 물을 적게 넣어 단맛을 올리고 싶을 때 구멍떡을 빚는다. 속까지 잘 익으라고 구멍을 내어 떡을 삶아 짓이겨 끈적한 반죽으로 만들어  당화력이 높아진 까닭이다.  실제로 구멍떡으로 빚은 동정춘 같은 전통주는 맛이 상당히 달다. 하지만 호호는 그렇게 달지 않다.

중원동 홈페이지 발췌


셋째 잔

고운 노란빛으로 물든 새콤함이 입안을 훑고 난 후 혀 안쪽과 목젖에 남는 들큼함이 아쉽다. 구멍떡으로 빚은 술 치고는 그리 달지 않지만 뒷맛에 남는 들큼한 여운은 제법 길다. 재료명에 용량이 표기되지 않아, 단호박의 함량 비율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맛보다는 색에 더 큰 영향을 준 듯하다.


넷째 잔

디자인도 귀엽고, 색도 귀여운 술이 자연스레 산소를 만나니 시큼함이 제법 터프해졌다. 375ml  귀여운 용량의 노란색 막걸리 안에서 기운 좋은 산미가 넘쳐 나온다. 외모가 주는 인상을 부수는 시큼함이 좋다. 덕분에 천천히 음미하며 마실 여유가 생긴다. 만일 단맛을 좀 더 느끼고 싶다면 호호로 입 안을 가득 채우면 된다. 숨겨진 단맛이 확실히 모습을 드러낸다.


30여 년 전 안암동 로터리에 고려치킨이라는 호프집이 있었다. 가게 이름이 고려치킨이지만 졸업 때까지 치킨을 먹어 본 기억이 없는 단골 호프집이었다. 참새 방앗간 못 지나가듯 고려치킨을 무사히 지나가긴 힘들었다. 늘 고려치킨을 지날 때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가볍게 한 잔?”을 외치며 삼삼오오 입장을 했다. 당시 생맥주 500cc 한 잔에 500 원이었고, 설탕 솔솔 뿌린 떡튀김 수북이 한 접시가 1000 원이였으니, 정말 가벼운 술자리였다. 밀떡을 비엔나소시지 크기로 잘라 기름에 튀겨 설탕 옷을 입힌 떡튀김은 어찌나 생맥과 잘 어울리던지. 술값도 가볍고, 안주값도 가볍고, 호주머니도 가볍기에 단골 인맥으로 가볍게 학생증을 맡기며, 무거운 생맥주잔을 쌓아갔다. 좋은 벗들과 함께.


이제는 추억을 잘근잘근 안주 삼아 씹고 있는 나이가 되었다. 가벼운 주머니야 여전하지만, 맡길 학생증도 없고 맡아줄 고려치킨도 없다. 오래된 친구들을 불러 모아 마음은 가볍게, 술은 무겁게 마시려니 매서운 눈치가 보인다. 이럴 때 노란색 호호는 괜찮은 대안이다. 캐주얼하게 딱 ‘한 잔’하기에 좋고, 아쉬움에 딱 ‘두 잔’만 더 해도 그리 부담되지 않는다. 해바라기 꽃을 닮은 고운 노란빛은 바라만 봐도 좋다. 9도 이기에 너무 허전하지도 않다. 편하게, 가볍게, 부담 없이, 홀로 한 잔 할 수 있는 막걸리 호호. 이런 게 요즘 스타일일까?


승발이의 맛 평가 : 빛깔이 참 고운 막걸리. 구멍떡으로 빚은 술치고는 단맛이 약하고 산미가 상당히 강한 편이다. 호박은 맛보다는 색을 입히는 데 더 큰 역할을 한 듯. 355ml에 15,000 원. 가성비는 마셔보고 판단하시길. 4.0점(5점 만점)


어울리는 맛과 멋 : 집 냉장고에 떡볶이 떡이 있다면 뜨거운 기름에 화끈하게 튀겨 설탕 솔솔 뿌려 안주 삼아 드셔보시길. 호호 막걸리와 찰떡궁합이다. 노래안주는 조니 미첼도 좋지만 호호 막걸리에는 주디 콜린스의 ‘Both Sides Now’가 더 찰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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