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PD의 맛있는 이야기
"여수 밤바다~ 이 조명에 담긴~ 아름다운 얘기가 있어~ 네게 들려주고파"
밤바다를 사브작사브작 걷기 좋은 6월이다. 여수로 떠나보자. 아름다운 먹거리가 있고, 알려주고픈 보석 같은 집이 있다. 정감 있는 현지 맛집. 믿고 따라와 보시라. 왜 여수냐고? 여수는 맛동산이니까.
여수에서 맛집 찾기는 쉽다. 숙성회의 조일식당, 대광어로 유명한 미로횟집은 도심의 명소다. 관광객 상대로 대형화된 돌게장 골목도 충분히 제 몫을 한다. 연등천 포차 거리에서 주택가로 이사한 41번 포차도 명불허전. 풍경과 명성을 동시에 품은 나진국밥도 좋다. 푸른 남해 바다를 마주한 노포의 순댓국과 수육은 전국구 수준의 맛이다. 여수 서시장 떡집들은 신묘하다. 시루떡도 찹쌀떡도 목이 메지 않는다. 아이스크림처럼 입에서 녹아내린다. 발품 조금 팔면 여수에서 음식으로 실망할 일은 없다. 문제는 정보의 대중화 덕분에 유명 맛집은 언제나 문전성시라는 점이다. 여수까지 와서 재료소진과 마주함은 재앙이다.
작년 봄에 여수의 유명 갈치집을 찾아갔었다. [전현무계획]에 나온 집이었다. 제주 은갈치(낚시로 잡은 갈치)와 목포 먹갈치(그물로 잡은 갈치)처럼 여수도 갈치로 유명하다니 호기심이 일었다. 저녁 식사 때 갔더니 역시나. 가게는 사람으로 가득이고, 갈치는 소진이다. 어쩔 수 없이 돌아갈 수밖에. 이런 재앙이 나에게 오다니. 너털거리며 걷다 보니 환한 간판이 눈에 띈다. [100번 실내포차].
청춘들에게 여수는 '낭만포차'의 도시다. 이순신 대교 밑의 낭만포차촌은 여수 야경과 어울려 유명 관광지가 되었다. 신김치를 키조개, 삼겹살과 불판에 구워 먹는 '해물삼합'은 낭만포차촌의 명물이지만 원조는 아니다. 여수 야경을 위해 인위적으로 조성된 거리에서 명물 음식이 나오기는 쉽지 않다. 스토리가 태동할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해물삼합'은 여수 서시장 뒤 연등천 포차 거리가 고향이다.
"해물삼합은 원래 (연등천) 24번 포차가 원조입니다... 새벽 2~3시까지 술집이 늦게 끝나면 그 시간에 먹을 게 없으니까 우리 포차로 와요. 술집 아가씨들이 이모 남은 것에 술 한잔 먹게 안주 만들어 달라고 해서 이것저것 남은 안주를 넣어 삼합을 만들었는데 맛있다는 입소문이 퍼져 해물삼합을 주종목 안주로 만든 거예요" (출처 : 여수넷통뉴스)
[100번 실내포차]는 젊은 청춘의 낭만 포차와도, 전통의 연등천 포차와도 관계가 전혀 없다. 상호만 '100번'인 평범한 동네 포차다. 관광객 대신 동네 손님들의 사투리만 가득하다. 조그만 가게에 없는 메뉴가 없다. 해물 삼합과 선어회에 갈비탕과 제육볶음, 막창에 곱창전골도 있다. 모 아니면 도. "사장님 혹시 병어회 될까요? 여수 막걸리도 있으면 좋겠는데". 생경한 서울 말투에 주인아주머니 눈이 동그래진다. "병어회요? 회로 해드려요?".
반찬이 깔린다. 여수 맛집들은 반찬으로 외지인의 기를 꺾는다. [100번 실내포차]도 예외는 아니다. 열무김치, 잔멸치 볶음, 번데기탕.. 평범한 반찬인데 맛의 내공이 상당하다. 냉동 숙성한 병어회가 나왔다. 이 집 진짜다. 초장 대신 양파 가득 썰어 넣은 초된장이 함께다. 이게 여수식이다. 시큼한 여수 생막걸리에 고소한 병어회를 초된장과 함께 먹는다.
"사장님 너무 맛나요". "아따 그려요? 여기 어떻게 알고 오셨소?". "그냥 지나가다 왔는데 정말 괜찮네요". 외지인의 칭찬에 신난 사장님이 달짝 서비스를 들고 온다. 바로 썰어 나온 해삼이다. "서비스니까 편하게 드쇼".
서비스로 준 음식이 맛이 없거나 배가 불러 먹기 어려울 때면 난감해진다. 서비스 해삼이 딱딱했다. 난감했다. 뭐라 할 수도 씹을 수도 없는 진퇴양난. 때 마침 구원군이 등장했다. "어이 친구. 이 해삼 못쓰겄구만. 딱딱해서 씹을 수가 없네. 물건 어서 가져왔는가?". 뒷자리 동네 손님들이 직구를 날린다. "잉? 그럴 리가 없는데. 외지 손님 미안혀요. 잠시만요".
주인장의 손맛은 위기 때 발휘된다. 해삼을 끓는 물에 후루룩 데쳐서 다시 내온다. 해삼 맛이 살캉살캉 살아났다. "으따. 이러니 먹겄네. 장사 똑바로 혀". "서비스 처묵으면서 말도 많네". 이 집, 정감이 있다.
소라숙회를 시키니 뜨뜻한 홍합탕도 같이 내준다. 속 채우면서 먹으라고 고구마랑 누룽지탕도 건넨다. 산 낙지를 시키니 프라이팬을 가스불에 올린다. 순천 명물이라며 달걀옷 입힌 명태 대가리를 전으로 부쳐준다. 물론 공짜다. 서비스 음식이라고 빈 맛이 없다. 야무지고 따뜻하다. 음식맛을 칭찬하니 주인아주머니 입이 귀에 걸리더니 말린 깨장어(붕장어 새끼)를 구워준다. 그냥 잡숴보란다. 가게가 맛있는 온기로 훈훈하다. 주인아주머니의 정감이 가득하다. "맛나게 잡수니 내가 좋소".
대학생 시절 귀갓길 포장마차의 유혹은 낭만이었다. 연탄불 위 꽁치는 몇 푼 없는 내 주머니를 유혹했고, 인심 좋은 포장마차 아줌마의 공짜 홍합탕과 서비스 닭똥집 몇 점은 치명타였다. 포장마차는 귀가 길의 행복하고 따뜻한 일탈 공간이었다. 뻔하지만 싸고 맛있는 안주와 달달 씁쓸한 소주가 있었고, 술 취한 청춘의 푸념을 들어주는 주인아줌마 미소가 있었고, 친구들이 있었다. 나의 '동네'를 완성시켜 주는 마지막 퍼즐은 포장마차였다. 그리고 30년을 훌쩍 넘어 만난 [100번 실내포차]에서 나는 여수의 마지막 퍼즐을 맞추고 있다.
"이것도 맛 좀 보소". 갓 튀긴 김부각을 막걸리 안주 삼으라고 내온다. 바사삭. 먹어본 김부각 중 최고의 맛이다. "이렇게 맛있는 걸 막 주셔도 돼요?", "우리 아들 반찬으로 한 것잉께. 편하게 드쇼". 고소한 김부각으로 막걸리 한 통이 사라졌다. 시킨 안주는 세 개뿐인데 테이블 위가 서비스로 빼곡하다. 멀리서 와 준 것도 고마운데 맛나게 먹어주니 더 고맙다며 주방에서 또 부스럭 소리가 난다. 숙소에서 먹으라며 비닐봉지 가득히 김부각을 담아 내왔다. 여수 여행길에서 나는 푸근한 낭만과 마주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