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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웅 Dec 15. 2022

삶의 밀도 #4

관계(3) : 나

 흔히들 ‘관계’라는 단어를 접할 때 ‘대인관계’, ‘가족관계’, ‘교우관계’ 등을 떠올립니다. 특별히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 사상은 공동체 가치를 개인적 가치보다 우선시하는 철학이 사회 내 짙게 배어 있는 경향이 강해서 선뜻 ‘관계’ 하면, ‘나’를 떠올리지 못하는 게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봅니다.


 평범한 가정환경에서 자라지 못했던 저는 ‘나 자신’과의 관계가 썩 좋지 못했습니다. 자존감이 낮았죠. 괴로웠습니다. 많이 울기도 했고요. 수치스러운 감정을 자주 겪었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못생겼지? 머리라도 좋았으면, 그렇다고 성격이 밝고 쾌활한 것도 아니고, 특별하게 잘하는 것도 없네? 나는 정말 무쓸모다. 이생망이다. 이런 와중에 보육원에서 겪은 상처까지 더해지니 정말 괴롭더라고요.


 나 자신 속에서 내가 나를 좋아할 만한 이유를 찾지 못하고, 점차 나를 미워하고, 포기하고자 하는 마음이 굳어지니 내면은 점차 황폐해졌습니다. 메마른 사막과 같이 황폐한 토양은 생명이 움트고 자라기에는 부적절하죠. 이처럼 황폐해진 제 내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언어, 태도, 분위기는 먼저 나를 살리지 못했습니다.


 결국, 나를 살리지 못하는 좋지 않은 것들에 과몰입됐습니다. 술, 담배, 온라인 도박, 선정적인 매체에 자주 노출됐습니다. 학생 때 비전을 갖고 시간을 투자하여 차츰차츰 미래를 쌓아 올려도 부족한데, 최소한 건강한 취미에 몰입하는 게 나았겠죠. 비전과는 반대되는 유해한 환경에 몰입되다 보니 황폐해진 내면은 황폐해지다 못해 어두워졌습니다. 그리고 외면으로는 거칠어져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부정적 결과를 낳았습니다.


 배타적인 성향이 강해지기 시작해 급기야는 나와 남이 모두 싫어지고, 미워졌습니다. 다투고 싸우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공격적인 말투와 분위기는 남을 불편하게 했습니다. 자기주장도 강한 편이라서 적을 만들기에는 최적화된 조건이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가까운 친구도, 선후배도 없었습니다. 피상적인 관계에 불과했죠. 혼자 있는 시간이 더 좋았으니까요. 나쁜 짓을 하기 위해 함께 하는 친구들도 더러 있었지만 그 관계 또한 오래 갈게 못 됐습니다.


 대학 재학 중 사람 때문에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충격이 커서 학업을 중단까지 고려했습니다. 다시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혼자 지내는 시간의 밀도는 이전과는 달랐습니다. 황폐해진 나의 내면을 살릴 수 있는 생산적인 독서, 사색, 운동, 등산 등이었습니다.


 독서를 통해 내가 겪은 세상 외 것들을 접하고, 만날 순 없으나 나보다 대단한 위치에 있거나 좋은 경험을 한 이들을 만났습니다. 내가 겪은 상처보다 더 깊은 상처와 아픔을 딛고 삶을 지탱해온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사색을 하면서 삶을 이렇게 사는 게 맞나? 나는 왜 이렇게 공격적이지? 나는 왜 나를 미워하지? 나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던 사람들도 꿋꿋하게 탓하지 않고 이겨내어 위대한 삶을 일구었는데, 최소한 자신의 삶을 삶답게 건사했잖아. 너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나를 살리는 생각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건설적인 생각이 열리기 시작하니까


 등산을 하면서는 오색 찬란한 생명들을 마주했습니다. 이 또한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물론, 거기까지 나아가는데 어려움이 없진 않았지만, 막상 나가서 공기도 쐬고 시시각각 변화하는 자연의 모습을 관찰하면서 ‘나’에 대한 감정이 조금씩 좋아지는 것 같았습니다.


 평생 남 눈치만 보면서 살다가 나에 대해 집중적으로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니 어차피 삶을 살아내야 한다면 지금보다는 나를 덜 미워하고 나를 존중해주자. 물론, 나는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가정에서 자랐고, 잘하는 것도 딱히 없고, 성격도 더럽고 키도 작고 못생겼지만, 일단, 나만 생각하자. 그동안 나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적었으니, 나에 집중하자면서 나를 다독여줬습니다.


 나를 위한 음식, 나를 위한 여가생활, 나를 위한 시간, 나를 위한 쉼, 나를 위한 걱정과 생각, 오직 나만을 위한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를 존중하자는 나를 귀하게 여기자는 다짐을 했습니다. 꿈도 가져봤습니다. 그래서 시간을 아끼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을 아낌은 결국 나를 아낀다는 것이죠. 조금씩 착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적어도 나에 대해서 말입니다.


 덕분에 박사학위도 받고, 제가 하고 싶었던 정책, 제도 개선 업무도 했습니다. 나와 같이 아픔을 겪을 것 같은 ‘청소년 부모’에 대한 법률적 정의와 서비스 지원 내용이 담긴 법률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을 때 뿌듯했습니다. 보호종료아동의 호 종결 연령을 24세로 상향한 개정안을 만들어서 그것이 결국 본회의를 통과했을 때도 감사했습니다.


 나와의 관계를 개선하는 노력과 경험이 없었다면, 나 자신과 화해하지 못했더라면, 나를 살리는 건 고사하고, 남을 살릴 수 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아직까지는 남과 그리 잘 지내는 편이 아닙니다. 물론, 노련하게 능숙하게 교묘하게 처세하고 있습니다. 제가 성자도 아니고, 저도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가 많은 사람입니다.



그래도 요즘은 남 눈치보다는 제 눈치를 많이 봅니다. 남보다 나를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과 먼저 건강한 관계를 맺어야 나 외 사람들과 건강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신의 자기와 잘 지내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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