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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젤리피시 Jun 09. 2020

4. 전원생활 판타지 척살기_논두렁 악당의 탄생

종중 땅 건드리면 조상이 노(no)한다.


 박카스 로비스트     

검정 봉지에 싼 동아제약 박카스를 거안제미(擧案齊眉) 대형으로 받쳐 들고, 나는 임금 본 내시처럼 먼발치부터 굽신거리며 잰걸음으로 다가섰다.    


“하이고, 어르신 안녕하셔유.”

“누구랴?”

“아, 요 위에 얼마 전 땅 사서 집 좀 지을라는 사람이어유.”    


절대 ‘을’의 방문을 눈치챈 노인은 대번에 턱이 올라가고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런데. 뭣 땜에 왔디야.”    

“다름이 아니고 집을 지을라다 보니 상수도관도 연결하고, 요 앞에 구거(溝渠, ditch 개울)에 오폐수 관도 좀 붙여야 하는디.. 도로 경계 따라 관을 묻을라니 으르신 땅을 쪼꼼 지나가야 되더라고요. 토지 사용 승낙 좀.”    


나는 잽싸게 박카스를 까 노인의 턱밑에 올려붙이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노인은 기다렸다는 듯 내 땅의 전 주인에게 당한 울분을 각혈하듯 토하기 시작했다.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30분짜리 분노 투성이 모노드라마의 시놉시스(synopsis)를 한 줄로 요약하면 어이없게도 ‘비 오는 날 흙탕물이 내려와 기분이 나빴다.’였다.

나는 가련한 노인이 어서 빨리 비가 와도 흙탕물 대신 초정리 광천수가 흐르는 땅에 환생하길 빌었다.         


“아, 그러셨구만요. 저는 절대 피해를 안 끼칠 테니 토지 사용 승낙 좀..”    


노인은 내 말을 귓등으로 듣더니만 손목 스냅으로 박카스를 튕겨 목구멍에 털어 넣었다.      


“근디, 거긴 내 땅 아녀. 0 씨 종중 땅이여. 종친회 가서 알어 봐.”    


이런, 박카스를 낚아채기에는 너무 늦었다.       


전화 셔틀      

며칠 뒤, 검정 봉지에 싼 동아제약 박카스를 거안제미(擧案齊眉) 대형으로 받쳐 들고, 나는 엄처시하 공처가처럼 먼발치부터 굽신거리며 잰걸음으로 다가섰다.    


“하이고, 종친회장님 안녕하셔유.”

“누구랴?”

“아, 요 마을에 얼마 전 땅 사서 집 좀 지을라는 사람이어유.”    


절대 ‘을’의 방문을 눈치챈 종친회장도 대번에 턱이 올라가고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런데. 뭣 땜에 왔디야.”    

“다름이 아니고 집을 지을라다 보니 상수도관도 연결하고, 구거에 오폐수 관도 좀 붙여야 하는디.. 도로 경계 따라 관을 묻을라니 종중 땅을 쪼꼼 지나가야 되더라고요. 토지 사용 승낙 좀.”    


나는 잽싸게 박카스를 까 종친회장의 턱밑에 올려붙이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종친회장은 나를 당신의 오른편에 가차이 앉혀놓고는 42대에 걸친 지리멸렬한 0 씨 문중 내력을 30분 동안 역설하였다. 가장 높은 벼슬을 단 사람이 종 3품인가까지 올라갔다는 대목에서는 자못 목소리가 떨리기까지 했다. 족보 첫 장이 태조 이성계 어진(御眞)인 나로서는 그다지 감동적인 서사는 아니었다.     


“정말 대단한 집안시군요. 그렇다면 자랑스러운 가문의 이름을 걸고 토지 사용 승낙 좀.”

“아, 종중 땅 쓸라믄 종친들의 승낙을 받아야지.”

“종친님 몇 분이나 승낙을 받아야 하나요?”

“응, 얼마 안 디야. 한 쉰 명.”

“아, 쉰..발.”

“응, 안 그러면 종친회 총회 안건으로 올려서 승인을 받어 내야지.”

“총회는 언제쯤 열리나요.”

“그건 알 수 없지. 1년에 한 번 할 때도 있고. 바쁘면 2~3년에 한 번.”

“제가 좀 급해서 그런데 도와주실 수 없을까요.”

“기다려봐 내가 전화로 물어봄세.”    


동아제약 박카스로 점잖게 목을 축이신 종친회장님은 전화기를 들더니 통화 셔틀을 시작하셨다. 통화음질이 스피커폰 수준이라 동시통역처럼 잘 들렸다. 내용은 대략 이랬다.     


“어? 누구라고? 종찬이? 종찬이가 누구지? 아, 종을 쳐? 누가? 아, 종친회! 근데 왜? 나 바뻐. 토지 뭐? 승? 승이 뭐랴? 아, 안 들려. 뭔지 몰러두 안 된다 그랴. 뭘 해줘 구찮게. 어? 뭐라고? 바꿨어? 뭘 바꿔? 어, 박카스를, 어, 마셨다고..”     


비슷한 내용으로 세 분과 통화하는 과정을 지켜보자니 심정지가 올 것처럼 낙심도 그런 낙심이 없었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지으려고 땅을 샀는데. 수도관 하나 묻자고 꼼짝없이 언제 열릴지도 모르는 남의 문중 종친회 총회를 기다려야 할 판이다. 시작도 해보기 전에 종중 땅에 발이 묶여 고립무원이 되어버렸으니 이를 어쩐단 말인가. 그래! 관을 묻을 수 없다면 상수도 대신 우물을 파고, 오폐수관 대신 정화조를 묻는 수밖에. 나는 이를 악물었다.      

종중 땅은 지뢰밭이다.     

집은 풍경 좋은 곳에 건물만 덩그러니 짓는다고 되는 게 아니다. 집은 세상과 연결해야 비로소 살 수 있다. 먼저 땅에 도로가 연결돼 있어야 한다. 물을 끌어올 상수도관을 묻어야 한다. 전봇대를 박아 전기를 끌어야 한다. 가까운 구거까지 오폐수 관도 연결해야 한다. 인터넷도 연결해야 하고, 케이블 tv도 연결해야 한다. 그러자면 저런 것들이 내 땅 근처 어디까지 와있는지 파악해 접점을 찾아야 한다. 그다음 집까지 최단거리 선을 그어야 하고, 그 선이 다른 사람 땅을 지나간다면 토지주에게 박카스를 받치고 사용 승낙을 받아내야 한다. 그런데 그 땅이 하필 종중 땅이다? 그러면 오지게 얻어걸린 것이다. 

우리 민법 275조는 총유(總有)라는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종중 땅처럼 종친회원들이 땅을 공동 소유하는 형태를 말한다. 이런 부동산을 거래하자면 종친회원 전원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동의를 얻어야 한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대안으로 종중 규약이나 정관에 부동산 관리 처분에 관한 내용을 정해놓거나, 종친회 총회를 열어 의결을 받아야 한다. 안 그러면 모든 행위는 무효다. 종친회장하고 짬짜미로 종중 땅 거래계약을 썼더라도 나중에 누군가 문제를 제기하면 무효가 된다. 종친회장이 총회 의결을 거친 것처럼 회의록을 조작했고, 상대방이 이를 믿고 거래했더라도 무효다.     

[대법원 판례]   
종중 소유의 재산은 종중원의 총유에 속하는 것이므로 그 관리 및 처분에 관하여 종중규약에 정하는 바가 있으면 이에 따라야 하고, 종중규약이 없으면 종중총회의 결의에 의하여야 한다. 절차를 거치지 않은 행위는 무효다. (대법원 2007.4.26 선고 2005다 31033 판결)   

말 그대로 종중 땅은 사기도 어렵고, 종중 땅 밑으로 수도관 하나 묻자고 토지 사용 승낙을 받기도 어렵다. 그냥 지뢰밭이라고 보면 된다. 졸지에 종중 땅에 포위된 나는 새장에 스스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근 새 꼴이 되었다. 이 종중 땅 사태는 시골 논두렁 악당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으며, 이후 끊임없는 악성 민원에 시달리는 단초가 되었다. 종중 땅에는 송곳 하나 꽂을 수 없게 되었고, 남의 종중 땅을 건드리면 조상이 노(no)한다는 뼈아픈 교훈을 배우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는 이 사태를 어떻게 슬기롭게 해결했을까. coming s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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