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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젤리피시 Jul 09. 2020

7. 전원생활 판타지 척살기_논두렁 악당의 탄생 2

구거(ditch, 溝渠)가 그거였어?


구거가 그거였어?                        


사전적 의미의 구거(ditch, 溝渠)란 물이 흐르는 작은 개울이다. 하천보다 규모가 작은 4∼5m 폭의 개울이며, 기본적으로 국가 소유다. 그동안 부동산에 관심이 없었다면 구거를 척 듣고 그 뜻을 착 간파하기란 쉽지 않다. 한문을 병기하지 않은 경우 오래된 집, 구거(舊居)라고 착각하기 십상이다.   


공간정보의 구축 및 관리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58조
구거란 용수(用水) 또는 배수(排水)를 위하여 일정한 형태를 갖춘 인공적인 수로·둑 및 그 부속시설물의 부지와 자연의 유수(流水)가 있거나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소규모 수로 부지   


시골에 집을 지으려는 사람들에게 구거는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하다. 첫째, 집에서 나오는 오폐수의 처리다. 집을 지으려면 가장 먼저 정화조를 통과한 오폐수를 배출할 길을 찾아야 한다. 그 루트가 바로 구거다. 구거가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 도로가 있으면 도로 점용 허가를 받고 도로를 따라 관을 묻어야 한다. 구거까지 가는데 남의 땅을 지나야 한다면 그 땅 주인에게 토지사용 승낙을 받아야 한다. 안 그러면? 건축은 불가능이다. 구거가 중요한 첫 번째 이유다.                                 


둘째, 구거를 진입도로처럼 이용할 수 있다. 모두가 알지만 건축허가를 받으려면 땅에 도로가 붙어있어야 한다. 진입로 없는 땅은 ‘맹지’로 건축허가를 받을 수 없다. 그런데, 맹지에 구거가 붙어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구거를 이용해 맹지에 진입로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에게 구거를 사용하게 해 달라는 점용허가를 받은 뒤 다리를 놓거나 구거를 메워 도로를 내면 건축허가를 받을 수 있다. 따라서 구거가 붙어있는 맹지는 가격이 싸면서 건축허가도 받을 수 있어 이득을 볼 가능성이 높다. 물론 구거 점용허가를 받으면 매년 나라에 점용료를 바쳐야 한다. 점용료는 공시지가의 0.5% ~ 5% 사이다. 구거 점용허가를 받는데 필요한 서류는 대략 다음과 같다.         

1. 신청서(농업기반 시설 목적 외의 사용승인 신청서)
2. 토지대장
3. 등기사항 전부 증명서
4. 사업계획서
5. 토지이용 계획 확인원
6. 인감도장
7. 주민등록 등본
8. 현장 사진
구거에 빠지다.    

내가 지금 구거에 대해 구구절절하는 이유는 본디 타고난 성품이 친절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3년 전 시골에 땅을 사고, 집을 짓기 위해 보란 듯이 건축허가까지 받아놓고는 구거 때문에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뻔한 엄청난 좌절담을 소개하기 위해서다. 

상황을 요약하면 이렇다.

내 땅으로 들어가는 길 중간에 구거가 가로 놓여 있었다. 지적도상에는 그저 구거로 표시돼 있고, 현실에서는 옆집이 진입로로 쓰고 있었다. 앞서 설명했듯 옆집이 구거에 붙은 맹지를 구입해서 구거 점용허가를 받은 뒤 진입로로 썼던가 보다. 

전후 사정을 알 리 없는 나는 건축허가를 받지 못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으므로 구청에 건축허가를 신청했다. 구청은 건축허가를 내주지 않을 하등의 이유가 없었으므로 바로 건축허가를 내주었다. 그리고 막 집을 짓기 시작했는데, 난데없이 옆집의 투서가 날아들었다. ‘공무원이 불법으로 건축허가를 내주었다.’는 경천동지 할 내용이었다.

놀란 나와 공무원은 동아제약 박카스를 사 들고 옆집 노인을 찾아갔다. 어떤 연유로 나의 건축허가가 불법이라고 주장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구거를 점용허가받아서 매년 점용료를 내가며 쓰고 있거덩! 근디, 그 짝 집으로 들어가는 도로가 구거를 건너가잖여. 그러면 내 땅이나 마찬가지인 구거를 건너댕길라믄 내 허락을 받아야 한다 이 말이여. 근데 공무원이란 자가 그런 것도 모르고 내 허락도 안 받고 덜컥 건축허가를 내줬으니 당연히 불법이지! 암만 불법이고 말고!”    


쉽게 말해 자기가 점용료 내고 구거를 쓰고 있으니 구거는 자기 땅이나 진배없다는 주장이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내 땅으로 들어가는 도로가 구거로 인해 댕강 잘린 것이고, 멀쩡한 내 땅은 졸지에 맹지가 되고 만 셈이다. 노인은 '옳타쿠나! 잘 걸렸다!'는 승리감을 만끽하며 건축허가를 취소하라고 공무원에게 앙앙 엄포를 놓았다. 나는 당시 노인의 말을 듣는 내내 조금만  인격수양이 덜 되었더라면 인명을 살상할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 분노 게이지가 급상승했다.     


“따지고 보면 노인의 말이 맞기도 하네요. 사전에 노인에게 구거 사용 동의를 받았어야 했는데, 제가 미스인 것 같아요.”  

  

작년에 입사한 듯한 20대 중반의 여자 공무원도 순순히 자기가 미스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벌써부터 작은 민원도 귀찮아하는 전형적인 공직자형 마인드를 습득한 듯했다. 큰 맘먹고 은행 빚을 내 땅을 사고 집을 지으려고 했는데, 알고 보니 건축허가조차 받지 못하는 땅을 샀다는 말 아닌가!      


“그럼, 제 땅으로 들어가는 도로가 구거를 건너가는 구간에 대한 점용료를 제가 내면 되지 않나요?”

“흥, 어림도 없지! 그렇게는 못하겠고, 아무튼 이 건축허가는 무횰세!”    


비싼 대가를 치르다.     

노인이 내 건축허가를 트집 잡은 데는 다른 속셈이 있었다. 구거 사용 허가를 써주는 조건으로 무리한 요구를 하기 시작했다.    


“일단 저 땅에 역-구배(逆勾配) 공사를 해주슈.”    


역구배? 역구배가 뭐지? 무슨 뜻인지 몰라 찾아보니 ‘물이 흐르는 방향의 경사와 반대인 수면이나 하천 바닥의 경사’라는 뜻이다. 쉽게 말해 내 땅에서 자기 집 쪽으로 비탈져있는 300평 남짓한 땅의 기울기를 반대로 만들라는 요구였다. 비가 오면 자기 집으로 물이 흘러내리니 자연의 법칙을 거슬러 물길을 바꾸라는 뜻, 하지만 그 땅은 전혀 남의 땅 아닌가!    


“아니 어르신, 그 땅은 남의 땅인데 제가 임의로 파헤칠 수는 없지 않나요?”

“그건 내가 모르겠고, 토지주 찾아서 허락을 받던지 알아서 하슈”    


나는 울며 생 고추냉이 짜 먹는 기분으로 토지주를 찾아가 어렵게 허락을 받아왔다. 그리고 중장비를 동원해 땅의 기울기를 역구배로 만들어주었다. 돈도 돈이지만 공사하는 내내 더럽고 치사한 기분에 울분을 떨치기 어려웠다. 너무 억울해서 어느 날인가는 자다가 악몽과 가위눌림에 벌떡 일어나 이를 악다물기도 했다.


“자, 공사 끝났습니다. 됐죠? 이제 구거 사용 허가서 써주세요.”

“아니지, 땅이 역구배가 되었으니 물이 고일 거 아닌가베. 저짝에다 맨홀 하나 앉히고, 구거까지 수로를 연결해주쇼. 그러면 내 허가서 써주지.”    


나는 다시 중장비를 불러 맨홀을 설치하고, 구거까지 땅을 파 배수관을 연결해주었다.


“자, 공사 끝났습니다. 됐죠? 이제 구거 사용 허가서 써주세요.”

“아니지, 내 공사하는 거 보니까 배수관을 너무 작은 걸 쓰더라고. 더 큰 걸로 교체햐.”    


나는 다시 중장비를 불러 묻었던 관을 모두 파내고 노인이 원하는 크기의 배수관을 새로 묻었다. 새로 묻는 관에 저 노인까지 같이 묻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일 평균 12회씩 치솟았다. 그때의 분노와 절망이란 3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도 조금 전 일처럼 생생하다. 옹졸한 내 성격상 앞으로도 전혀 잊히거나 사그라질 기미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 와중에 내 마음속의 루시퍼는 ‘그깟 시골 노인에게 절절매며 자존심 구기느니 땅을 버리고 도시로 돌아가 버려!’라고 속삭이며 내 귓불에 뜨거운 숨을 끊임없이 불어넣었다.

     

이게 다 구거 때문이다.   

나는 구거 점용 허가서 한 장을 받는 대가로 꼼짝없이 수백만 원어치 공사를 해주었다. 앞으로 10년 동안 자기 집 머슴이 되라는 요구를 하지 않은 게 어디냐고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했다. 나의 건축허가는 다시 유효가 되었고, 세상 물정 모르는 미스 공무원은 비로소 웃는 낯이 되어 복귀했고, 나는 꾸역꾸역 집을 짓고 여태 살고 있다. 점용 허가서를 받는 즉시 허가서를 쓴 볼펜을 이용해 없애버리기로 결심했던 노인은 아직도 살아있다.    


“내가 승질이 좀 급해서 그렇지 악한 마음은 없는 사람이여. 인제 이웃끼리 친하게 지내자고”    


1년쯤 지난 어느 날 노인이 찾아와 내게 건넨 말이다. 나는 순간 '지금이야 말로 이 노인네를 처치할 때가 아닐까'라고 진지하게 노인을 노려보았다. 맞은 놈은 아직도 시퍼런 멍투성인데 때린 놈이 찾아와 웃는 낯으로 친하게 지내자는 상황이라니.   

내가 가장 싫어하는 부류가 저런 말을 서슴없이 하는 자들이다. 자기 기분 내킬 때 상대방이 받을 상처 따위는 개의치 않고 서슴없이 저지른 다음 또 자기 기분 내킬 때 상대방의 감정 따위는 개의치 않고 ‘나는 원래 이러니 너는 무조건 이해해야 한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하는 자들 말이다. 

내가 고른 땅이 문제였을까? 하필 가장 가까이 있는 두 집 노인들에게 잇따라 조리돌림을 당하는 불운을 겪게 되다니. 새로운 시골 이웃을 향해 활짝 열릴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내 마음의 문은 정말 굳게 닫혀버렸다. 시골에서 기대했던 따듯한 온정 따위는 개나 줘버리기로 했다. 두 노인 악당 덕분에 내 시골살이 스타일은 데면데면하고 비사교적인 은둔형으로 굳어지고 말았다. 이게 다 구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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