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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젤리피시 Jul 11. 2020

8. 전원생활 판타지 척살기_가난한 호모 파베르

도구의 인간


파베르는 살아있다.

     

인류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aust 남쪽 + pithecus 아프리카 원숭이)부터 갈라진 것으로 간주된다. 이어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 능력이 있는 인간),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 직립 인간),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생각하는 인간)가 잇따라 출현했다. 이들이 순차 등장했는지, 비슷한 시대를 살며 엎치락뒤치락했는지는 직접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최근 작업한 능소화 지지대

이런 식으로 조상 인류의 특질에 따라 이름을 붙여가다 보면 어느 순간 호모 파베르(Homo Faber)를 만나게 된다. 그는 최초로 연장을 만들어 사용한 ‘도구의 인간’, 다름 아닌 공작인(工作人)이다.


현생 인류는 호모 파베르가 오래전 어느 시점에 분명 도태해 멸종한 줄로 알겠지만, 아주 착각이다. 우리나라 전원마을 아무 데나 가면 ‘1가구 1 파베르’ 일 정도로 수많은 현대판 호모 파베르가 생존해 있다.

도시를 떠나 시골로 들어가는 남자의 약 90%가 놀랍게도 예외 없이 호모 파베르로 환생하기 때문이다. 연장이 주렁주렁 달린 벨트나 멜빵을 걸치고 부족한 손재주를 장비로 ‘카바’하며 거드름 떠는 모습은 뭇 남자들의 영원한 로망이 아니던가.   




도구 수집 흐름도     

시골에 살면 제법 많은 도구가 필요하다. 텃밭 정도를 관리하기 위한 기본 도구 4종 세트라면 삽, 호미, 낫, 괭이 정도가 될 것이다. 무거운 물건을 나르다 허리가 뻐근해지면 금세 외발 손수레가 추가되고, 작물에 물을 주는 긴 호스와 호스가 닿지 않는 곳에 물을 주는 휴대용 물조리개쯤은 숨도 안 쉬고 구매 완료다. 망치, 갈퀴, 전지가위는 언제 샀는지 기억도 없다. 

텃밭 단계에서 나아가 고기 구울 불의 필요성을 인식하면 나무를 다룰 톱이나 손도끼가 추가된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사람의 힘으로 직접 부리는 단순 도구 수준이다.

시간이 흐르면 호모 파베르는 땅만 파헤치는데 만족하지 않는다. 창조적인 공작물을 손수 만들고 싶은 육덕진 본능이 샘솟는다. 망치와 톱만으로 만족되지 않는 허기를 느끼면 호모 파베르는 공기를 압축하는 에어컴프레서(Air Compressor), 그 압축 공기로 못을 박는 타정기(打錠機 타카), 구멍을 뚫거나 나사못을 박는 전동 드릴, 그리고 톱질 고행을 면하게 해주는 절단기까지 일괄 구입하는 세트피스 공격 단계로 진출한다.  

여기에서 진도가 더 나가는 고수는 이상에서 소개한 장비들을 종류별 풀세트로 구매해 장비실 벽에 주렁주렁 매달아 놓는다. 농업적인 측면으로 따지면 경운기나 트랙터를 구입하는 단계와 맞먹는다고 보면 된다.       


이것이 좋았다.   


나는 시골에 필요한 도구를 절반은 구매하고, 절반은 지인들에게 선물 받거나 물려받았다. 친구 창섭이가 내 다차를 방문하면서 자기 이름을 새긴 톱을 선물하거나, 동생 기훈이가 잘 쓰지 않는 잉여 도구 몇 가지를 분양해주거나, 전원생활을 접고 도시 아파트로 돌아가는 화성 공직자 형님이 ‘다 가져가라’며 트럭 채 실어주시기도 했다.

3년 사이 도구로 치면 재벌 호모 파베르가 된 나지만 그중 특별하고 유달리 정감 가는 도구 몇 가지가 있다.

1. 잔디 호미: 또는 갈퀴 잔디 호미라고도 한다. 손잡이는 호미처럼 생겼는데, 끝에 작은 쌍기역자형 갈고리가 달려있다. 풀과 주변 흙을 함께 퍼 올리는 호미와 달리 이 도구는 갈고리에 풀만 걸어 지렛대처럼 들어 올리는 신박한 도구다. 작물과 풀이 붙어 있어 자칫 작물에 피해가 갈 수 있는 상황에 특화된 초근접 백병전 무기다. 풀과 1:1 정면 승부를 벌이는 도구이다 보니 풀이 올라오는 손맛과 그립감이 최고다. 시골에 오기 전에는 이 도구를 본 적 조차 없었으나 도구를 알게 된 이후 호미를 잡은 기억이 없다.    

2. 절단기: 시골에 지인들의 방문이 잦다. 고기 구울 숯불도 피워야 하고, 캠프파이어나 난방용 땔감도 필요하다. 초기에는 근처 나무를 주워다가 니킥으로 토막 내거나 톱으로 썰기 마련이다. 하지만 새 톱은 그런대로 잘리는 반면 묵은 톱은 시간이 지날 수록 노력 대비 진도가 나지 않는 배신감을 선사한다. 어느 날 육질이 단단한 참나무 하나 자르겠다고 20분 연속 톱질을 하고 나면 누구나 곧장 공구상에 달려가 절단기를 사게 된다. 절단기는 물론 레저용이라기 보다 기타 공작에 필요한 핵심 도구라는 데 더 큰 의미가 있긴 하다.

공구라 하면 대부분 보쉬(Bosch)나 디월트(dewalt) 같은 외국 유명 브랜드를 사고 싶어 한다. 전문가 기훈이 말에 따르면 ‘직업으로 할 게 아니라면 굳이’ 고가의 외제 공구를 탐할 이유는 없다. 절단기의 경우 기능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지만 나는 ES산업에서 만든 16만 원짜리 저렴한 슬라이딩 각도절단기를 샀다. 기계치인 내가 금세 조립할 만큼 간단하고, 절단면 마감이 100% 깔끔하게 떨어지지는 않는다는 미세한 단점을 빼면 톱질에 지쳐있던 내게는 ‘하느님께 경배할’ 아이템이다.     


3. 전동 드릴: 처음엔 지인이 물려준 대형 유선 전동드릴을 썼다. 아쉬운 대로 유용했던 반면 작업할 때마다 너무 무거워 손목이 아프고, 유선이다 보니 선을 끌어야 하는 게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실력 부족으로 피스가 박히다 중간에 멈추기 일쑤였고, 무리해 힘을 주면 피스 대가리가 뭉그러져 박지도 빼지도 못하는 낭패가 빈발했다. 그러다 작고 가벼우면서 무선이면서 리튬이온 배터리를 장착했으면서 파운딩(Pounding) 기능이 있는 보쉬 해머 드릴을 만나게 되었다. 드릴링 도중 스스로 망치질을 가미해 놀랍도록 스무스하게 피스를 박는 달란트 를 지니고 있다. 쓰면 쓸수록 가히 수월한 손맛이 일품이다. 피스가 나무에 ‘박힌다’기 보다 나무에 ‘스며든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성능 면에서 탁월함을 느꼈다.     

뭐, 쓰다 보니 제품 홍보 같은 저렴한 기분이 되었다만 시골에서 호모 파베르로 살며 사용했던 도구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세 가지를 즉흥적으로 골라보았다.

      

 갖고 싶다.    

내가 마지막으로 구입한 도구는 사다리였다. 지난주 능소화나무 지지대 설치 작업을 위해 7만 7천 원을 주고 산 3단 접이식 알루미늄 사다리이다. 오랜만에 사다리 위에 올라가 작업을 하다 보니 높지도 않았는데 상당한 심리적 부담감이 느껴졌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기본적으로 수초처럼 흔들린다는 사실을 사다리가 깨닫게 해 주었다. 사다리에 이어 내가 추가로 사고 싶은 도구는 다음과 같다.     

1. 예초기:  앞마당에 자라는 잔디를 관리하는 데 지인에게 물려받은 보쉬 충전용 잔디깎이를 쓰고 있다. 미용실에서 쓰는 바리캉(Barriquand 프)보다 조금 큰 도구로 비교적 좁은 공간을 관리할 때 탁월하다. 반면 집 주변에 자라는 큰 칡넝쿨을 비롯한 잡풀과 잡목을 제거하는 데는 역부족이다. 올여름까지 버텨보고 불가항력이면 성난 오토바이 소리가 나는 예초기를 결국 구입하게 되지 않을까.    

2. 수평계: 현재 나무를 이용한 공작물 설치 작업을 할 때 100% 눈대중으로 수평을 가늠한다. 공작의 규모가 커질수록, 나무의 재질이 고급일수록, 실패로 인한 낭비가 커질수록 예상하지도 않았던 수평계에 대한 열망이 덩달아 커지고 있다. 눈대중으로 수평을 맞춰 기껏 피스질을 했는데, 나중에 다른 방향에서 보니 전혀 엉뚱하게 기울어 있을 때 느끼는 좌절은 형언하기 어렵다. 가격을 검색해보니 겨우 만 원 안팎인데 나는 대체 무엇을 망설이고 있는 것인가.    


3. 전동 대패: 스테인 칠까지 마친 완성 작품을 맨손으로 쓰다듬다가 불규칙하게 돌출한 나무 보풀에 숱하게 찔려 출혈의 고통을 맛보았다. 언제까지 사포질을 할 것인가 스스로 한탄하면서도 호모 파베르는 늘 돈에 쪼들려 살아온 버릇 때문에 아직은 버텨보기로 한다. 보드라운 질감과 유려한 곡선, 세련된 코너링을 위해서라면 전동대패, 너 정말 갖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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