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콜드 체이싱'
제설차 운전수 넬스 콕스맨은 올해의 시민상을 받을 정도로 모범적이면서도 평범한 시민이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어느 날, 그의 아들이 처참한 시체로 발견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경찰은 아들의 사인이 약물 과다복용이라고 알려주지만, 넬스는 그 말을 믿을 수 없다.
아들의 죽음으로 깊은 상처를 안은 그는 아내와도 갈등을 겪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한다. 그런데 그 때 아들의 친구가 나타나 사건의 진실을 말해준다.
친구가 마약을 빼돌린 일로 마약 조직의 타깃이 됐고, 아들이 이 사건에 휘말리면서 무고하게 죽음을 맞게 됐던 것이다. 이에 넬스는 아들의 친구로부터 들은 스피도라는 인물을 찾아 피의 복수를 하고, 이어서 림보, 산타 등 마피아 조직원들을 한 명 씩 처단해 나간다.
오늘 소개할 영화는 2019년 개봉한 리암 니슨 주연의 액션 영화 ‘콜드 체이싱’이다. 흰눈 가득 담긴 설원이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겨울과 참 어울리는 영화이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 꽤 좋아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노르웨이 출신의 감독 한스 페터 몰란트가 2014년 개봉해 베를린 국제영화제 경쟁부분에도 노미네이트된 바 있는 자신의 원작을 영어로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테이큰’ 이후 수많은 영화에서 화끈한 추적 액션을 펼치며 이제는 복수의 아이콘이 되어버린 리암 니슨 주연의 액션작이라는 점에서 그의 팬들로부터 많은 기대를 모았지만, 정작 국내 흥행실적은 10만명을 겨우 넘기는데 그쳤다.
왜 그랬을까? 앞에 잠깐 설명한 대략적인 줄거리만 보면, 그리고 리암 니슨이라는 배우에 대해 한국인들이 가장 먼저 기억하는 테이큰의 잔영을 고려하면, 이 영화는 다시 한 번 테이큰표 리암 니슨의 화려한 액션을 기대하게 한다.
각종 포털 사이트에서 이 영화의 장르를 액션으로 분류한다. 물론, 복수극인만큼 액션은 있다. 주먹질도 하고, 피도 튀고, 총도 쏜다. 일부 잔인한 장면도 있다.
하지만 영화를 본 관객들 중 다수는 이 영화의 장르를 액션보다 블랙 코미디에 가깝다고 평한다. 블랙 코미디는 희극의 한 형식으로, 비극적 요소를 오히려 웃음의 소재로 활용한다.
상황 자체는 고통스럽고, 잔혹하거나, 죽음이라는 어두운 소재를 다루는데 그 상황을 보는 시선을 살짝 뒤틀어 묘한 웃음을 유발한다. 비극이 상황 속 인물의 감정에 집중하고 공감을 일으키는 반면, 블랙 코미디는 비극적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장면 연출, 대상을 제외한 다른 이들의 튀는 모습, 그들과 상관없이 돌아가는 세상과의 대조 등의 방식으로 관객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서 인물의 내면 바깥에 널린 웃음 요소를 보게 한다.
그렇다. 많은 이들이 당연히 대략적인 스토리나 스틸 컷의 분위기만 보고 리암니슨 특유의 복수극을 기대했으나, 이 영화는 테이큰과는 완전 다른 영화였다. 관객들이 배신감을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결국 이 영화의 흥행 참패는 그 배신감에서 기인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대체 왜 테이큰하고는 완전 다른 영화인데 테이큰 같은 영화인 것처럼 마케팅을 했느냐고 이 영화를 본 많은 리암니슨의 팬들이 화를 냈다. 돌아보면, 이미 포스터부터 기만적이다.
여전히 잔혹하고, 슬프고, 리암 니슨은 진지하다
테이큰을 비롯한 많은 액션 영화 속 리암 니슨의 모습은 홀로 거대한 악, 폭력 조직에 맞선다. 현실적으로 한 명의 힘으로는 절대 대적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잔악무도하고 강력한 적들을 오직 가족, 사랑하는 이들의 한을 풀거나 그들을 지키겠다는 의지 하나로 더욱 처절하게 응징해간다.
키워드로 정리하자면, 가족, 홀로, 잔혹, 응징, 통쾌 정도가 되겠다.
콜드 체이싱은 여기에서 몇 가지 요소가 빠지거나 강약이 조절된다. 가족, 응징은 그대로지만, 잔혹과 통쾌는 약간 강도가 약해진다. 그리고 요소별로 약간의 유머 코드가 순간순간 갑작스럽게 끼어들며 강도뿐만 아니라 각 키워드에 대한 감각과 감정을 묘하게 변질시킨다.
또 리암 니슨이 맡은 주인공 넬스의 복수는 여전히 ‘혼자’ 진행되지만, 여기에 예상치 못한 인물들이 끼어들면서 잔혹하고 비정한 복수극은 하나의 소동극 같은 형태를 갖게 된다.
넬슨은 진지하다. 아들을 잃고, 이어 아내마저 떠나버린 상황에서 자살을 기도하지만, 아들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을 알고, 복수를 위한 실마리를 잡게 되면서 복수의 화신으로 변신한다.
이미 죽기로 한 인생이 다시 시작된 것은 오로지 복수 때문이다. 그는 하나의 실마리에서 다른 실마리를 찾아가며 조금씩 악인들을 처단해간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액션 영화라면 적의 중심을 향해가는 과정에서 단서를 찾고, 위기를 겪으며 응징의 순간마저도 숨 막히는 위험과 싸우게 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넬슨의 복수는 너무 쉽게 이뤄진다. 특히 초반부에는 이름만 듣고 누군가를 찾아가고, 범죄 조직의 일원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은 쉽게 넬슨에게 제압된다. 억눌린 서스펜스가 없다 보니 통쾌함은 조금 반감되지만, 그만큼 답답함은 줄어든다.
하지만, 당신은 웃을수밖에 없다
중반부부터는 넬슨 개인의 복수극이 아닌, 소동극으로 서서히 영화가 변하기 시작한다.
범죄 조직의 수장 바이킹은 자신의 부하들이 죽어나가자 아버지 대부터 영역을 분할해 마약 사업을 해왔던 인디언 조직을 의심한다.
바이킹은 다혈질에 모든 것이 자신의 통제 하에 있어야 직성이 풀리는 인물로,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인디언 조직의 우두머리 하얀소의 아들을 살해한다. 이에 분노한 하얀소가 복수를 다짐하면서 두 조직의 평화는 깨진다.
넬슨과 바이킹 조직 간 싸움에 하얀소의 인디언 조직까지 끼어든 형국이 되면서 이야기는 어수선해지고 어딘지 모르게 소란스러워진다.
이 소란스러운 과정에 예상치 못한 유머코드들이 불쑥 불쑥 튀어나온다. 일단 영화는 사람이 한 명씩 죽을 때마다 십자가 심볼과 죽은 캐릭터의 이름을 암전된 화면에 띄우며 마치 애도를 표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데 이러한 유머러스한 설정은 이 영화의 분위기와 성격을 일관되게 유지하는 장치가 된다.
또 넬슨이 고용한 킬러가 아무렇지 않게 바이킹에게 딜을 거는 장면이나, 무서운 바이킹 앞에서 눈치 없이 깐죽대다 결국 죽고 마는 조직원, 그리고 그 조직원이 사실은 조직의 2인자와 연인 사이이며 이로 인해 2인자의 숨겨진 분노가 결말에 결정적인 복수로 연결되는 이야기의 흐름 등 B급 영화 수준의 뻔뻔한 유머와 치밀한 아이러니가 묘한 재미를 선사한다.
마케팅 때문인지, 선입견 때문인지 리암 니슨의 많은 한국 팬들은 실망이 큰 모양이지만, 영화 자체는 상당히 신선하고 잘 만든 편이다. 해외에서 특히 영화를 평가하는 기준으로 많이 쓰이는 로튼 토마토 지수는 69점으로 70점 이상의 고평가를 받은 그룹들에 근접해있다. 조직과 폭력과 복수와 피가 뒤섞인 죽음의 이야기를 일관되면서도 유효적절하게 비틀어낸 신선한 작품이다.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콜드 체이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