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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범 Jan 24. 2021

오늘도 난 하늘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삶 #3

"수범이는 다 좋은데, 가끔 딴생각을 좀 하는 거 같아."


고등학교 2학년 생물 수업시간이었다.

학생들에게 유독 문제풀이를 강조했던 선생님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선생님께서는 수업시간의 일부는 이론을 설명하고 나머지는 학생들에게 정해진 시간 동안 문제를 풀도록 시키셨는데, 문제를 풀든 낙서를 하든 주변 친구들의 시선이 하나같이 책에 가 있을 때 내 시선은 창밖의 하늘에 머물고 있었다. 저 말은 그때 그 생물 선생님으로부터 들었던 말이다. 가끔 딴생각을 한다니. 내가?


그전까지는 스스로 인식하지 못했다. 내가 하늘을 바라보고 멍을 때린다는 사실을 말이다.


- 그냥 일상의 수많은 순간들 중 당연히 그런 순간도 있는 거 아닌가?

- 잠시 멈춰 서서 주변을 둘러보고, 하늘을 바라보고 하는 것도 중요해.


스물여섯이 된 이제서야 확고해진 이러한 생각들이 당시 열여덟 내 머릿속에 존재할 리 만무했다.

그때는 그냥, 그랬던 거다.



주변을 둘러보면 아름다운 풍경이 의외로 많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의 나는 여느 학생들과 크게 다를 바 없었던 것 같지만, 고등학교 시절 내 행동은 친구들과는 조금 달랐다. 특별했었다는 말이 아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를 포함해 친구들 대부분이 마음속에 품고 있던 작은 일탈들, 그런 일탈들을 다만 난 조금은 행동으로 옮겼을 뿐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일탈은 나쁜 행동, 위법 행위 뭐 그런 것들이 아니다. 이 사회가 학생들에게 요구하는 행동양식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학교에 지각하지 않고, 수업을 열심히 듣고, 공부를 성실하게 해야 하는 그런 것들 말이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 했던 일탈들은 대개 이런 것들이었다.


우선, 야자를 하지 않았다.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당시만 해도 나의 모교는 교육을 엄하게 시키는 걸로 명성이 나 있었고, 입학한 우리들에게 역시나 야자는 '필수'라고 못 박곤 했었다. 하지만 난 1학년 1학기가 끝날 무렵부터 야자를 하지 않았다. 학원을 가는 날이든 가지 않는 날이든 구분 없이. 밖이 껌껌해질 때까지 교실에 갇혀 있기는 싫었던 것 같다. 이후에도 마찬가지였지만, 대개는 성적표가 선생님들을 설득시키는 데 주요하게 작용했었다.


또, 방학 보충수업을 나가지 않았다. 앞서 정규학기가 끝나고, 매년 여름과 겨울에 그다음 학기에 배울 내용을 보충이란 명분 하에 진도를 선행하여 나가는 그 시기 말이다. 당최 방학에 학교를 왜 나가야 하는지 알 수 없었던 것 같다.

방학 때 메이플에 이벤트가 얼마나 많은데.


나아가서 고3 때부턴 정규수업시간이 끝나고 석식 전까지 있는 2시간가량의 보충수업을 빠졌다.

아마 2학년까지는 그 시간이 빠질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하진 못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 보충수업마저 빠지는 덕분에 내 하루하루는 좀 더 숨통이 트였던 것 같다.


학교에서 정규수업시간 외에 뭘 한다 하면 최대한 열심히 빠지고 열심히 게임을 했던 나였다.

그렇게 내 일탈은 고등학교 3년 내내 지속되었고, 갈수록 심화되었다.

당시 친구들은 성적도 꽤 상위권인 애가 왜 저러는지 종종 이해를 하지 못했던 것 같다.


난 왜 그랬을까?





고등학교 때는 나보다 성적이 좋은 친구들도 당연히 있었지만 나 역시 반에서는 보통 4등, 전교 등수로는 수학에서 1등을 해본 적도 있었고, 다른 과목에서 한 자릿수 등수도 이따금씩 들었었다. 성적만 놓고 보면 나라는 학생은 꽤 괜찮은 학생이었다. 그랬다. 성적만 놓고 보면.



한국에서 12년이라는 시간 동안 교육을 받고 나서야 든 한국의 교육시스템에 대한 내 생각은 이렇다.


우린 모두 이 나라 교육시스템의 수혜자이자 피해자이다.

이 시스템이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틀렸다고는 말할 수 없다. 나 역시 이 시스템 속에서 살아오면서 이득을 보기도 했고, 학창 시절 억지로 구겨 넣었던 지식들을 기반 삼아 살아가고 있기도 하니까.


그렇다 해도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현재의 교육체계는 진정으로 학생들을 위한 교육체계는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교육시스템이 학생들에게 성적 말고 무엇을 요구하는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공부 이상으로 중요한 삶의 근본적인 것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볼 것인지, 또 공부를 한다면 무엇을 위해 공부할 것인지 등에 대해 고민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인생철학에 대해 가르쳐주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나에겐 기억에 남는 은사님도 없다. 나에겐 모든 선생님들이 똑같이 이론과 문제 풀이법에 대해서만을 가르쳐 주었으니까.



우리 동네는 초저녁 경치가 예술이다



물론, 열여덟 즈음의 내가 저런 생각을 가지고 있던 건 아니었다. 그런데 뭐랄까, 그때도 이 시스템에 본능적으로 반감이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하기 싫으면 더욱 열심히 하지 않던 나이어 왔는데, 그런 나의 본성이 점차 발휘되고 있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공부 자체가 싫었다기보다, 공부를 맹목적으로 해야 하는 게 싫었다. 아무런 목적도 목표도 없이 단순히 머릿속에 이론을 채워 넣어서 문제를 더 많이 맞히고, 결과적으로 더 네임밸류가 높은 대학에 가야 한다는 그런 단순 명료한 하찮은 이유 때문에 하루 종일 의자에 앉아서 공부하기는 싫었다.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에 어느 정도 흥미를 느끼는 나이기에, 학창 시절 나에게 진정으로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를 고민하고 탐구할 여유가 있었다면 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고등학생의 나는 공부를 해야 하는 진정한 이유를 결국 찾지 못했었다.

그렇게 보충수업과 야자를 빠져댔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탓이었을까.

학교에서 내내 앉아 있다, 학원에 가기도 하고, 숙제를 하고... 그러면서 쌓이는 스트레스들을 난 게임으로 풀곤 했었다. 게임을 충분히 할 시간도 개인적으론 그렇게 많지 않았다. 특히 평일엔 말이다. 그러니 어떻게 그 이상의 것을 생각해볼 수 있었을까?


그러나 그런 시도를 미약하게나마 해봤던 건 분명하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시선을 창밖의 하늘에 두고, 지나가는 구름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때로는, 남들보다 고등학교 친구들과의 추억이 많이 없어서 조금 아쉽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렇지만 고등학교 시절부터 혼자 걷고, 혼자 자전거를 타며 하교를 하고, 수업시간에 혼자 창밖을 바라보고 그랬던 행동들이 결과적으론 지금의 내가 만들어진 데에 분명한 역할을 했다고 믿는다.

그리고, 난 지금의 내가, 현재 나의 사고와 가치관, 잣대 같이 나의 중심에 위치해 나를 이루고 있는 이것들이 좋다.


어떤 측면에서는 고등학교 2학년 2학기 때부터 차츰 공부를 놓기 시작한 게 성적이 떨어지는 결과를 낳았지만, 스스로는 공부한 만큼 나온 결과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성적이나 대학보다 중요한 나의 인생을 살게 되었으니 이 편이 훨씬 값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난, 요즘도 하늘을 바라보고 지낸다. 거의 매일.

그렇다고 먼 곳만 바라보며 눈앞의 현실을 놓치거나 외면하며 살진 않는다.

다만, 하루에 한 번쯤은 단 1분이라도 먼 곳을, 하늘을 바라본다.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고 싶다.



오늘도 난, 하늘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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