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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가또 그리고 고멘네

< 그 시절 그 문화: 펜팔 >

by 진샤



이야기가 절정에 가까워질 때 그의 표정은 달라진다. 그러면 나의 손가락도 덩달아 바빠진다. 앞페이지를 넘기며 내가 놓쳤을 적잖은 단서들을 다시 확인한다. 커튼의 묶인 방향, 전화선(전화선이라니! 이 얼마나 90년대다운 단어인지!)이 꼬인 횟수, 범인으로 유력한 이가 커피잔을 잡은 손, 하찮았던 그들의 대화들. 아무리 복기를 해봐도 나는 제자리인데, 그는 결국 말하고야 마는 것이다. 수수께끼는 모두 풀렸어. 그리고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힘을 주어 외친다. 범인은 이 안에 있어.

그 말을 하는 김전일이 너무나도 섹시해서, ‘범인은 이 안에 있어’ 이후에는 몇 차례 숨을 골라야 했다. 조목조목 사건의 진실과 범인을 밝히는 전일이 그저 멋져서 중학교 시절 나는 ‘소년탐정 김전일’이 이상형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그런 전일이 미유키를 쫓아다니는 건 용서할 수가 없었다. 뽀얀 피부와 고등학생치고 과하게 큰 사이즈의 가슴 말고는 딱히 내세울 게 없는 미유키를 내 이상형이 쫓아다니는 건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미유키만 없으면 완벽할 추리 시리즈, 김전일은 내 성장기의 시간에 함께 흐르는 이름이었다.

그는 내 중고등학교 육년의 시험 기간, 정확히 시험 이후를 책임졌다. 시험 기간동안 잠을 줄이고 집중해서 공부할 수 있었던 건 다 그 덕분인데, 시험이 끝나는 날 만화방을 가서 그동안 못 본 김전일을 대출 가능 권수 꽉 채워 빌려오는 기쁨을 만끽하기 위해서였다. 집에 오자마자 교복도 갈아입지 않고 방문을 걸어 잠궜다. 단행본 발행 차례에 맞춰 쌓아 옆에 둔 후 호흡을 고르고 읽기 시작했다. 저녁밥 먹는 시간 빼고 내내 읽다가 무서운 장면이 나오면 괜히 안방으로 가서 야구를 보는 아빠 옆에 앉거나 누웠다. 아빠의 무덤덤한 표정과 야구 중계의 나른한 소리가 살인 현장 특유의 기괴한 농도를 옅게 해 주었다.


열여섯 살의 맥박이 빠르게 뛰던 그때, 일본의 대중문화는 나의 산골 마을에도 천천히 스며들고 있었다. 김전일이 그러했고 스피드(SPEED, 스피-도)가 그러했다. 내 또래의 일본 여자애들 넷은 방방 뛰어다니며 춤을 췄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노래를 했다. 10대 초중반의 소녀 그룹이라니, 역시 일본은 다르구나. 노래를 잘하는 것 같진 않았지만 리듬이, 사운드가 고급졌다. 곡이 좋으니 괜히 보컬도 좋게 들렸다.

친구는 히로코를 나는 에리코를 좋아했다. 히토에는 춤을 잘 췄고 다카코는 예뻤다. 뿅망치나 들고 춤추는 우리나라 댄스그룹들이 유치해 보였다. 해적판이었지만 SPEED의 테이프를 구하기 위해 시내 곳곳의 음반 가게를 뒤졌고, 힘겹게 그들의 무대 영상이 담긴 비디오테이프를 구하면 숙제도 잊고 돌려 보고 돌려 보고 돌려 보고 돌려 보고 돌려봤다. 세까이쥬데땃따히토리노아나타니데아에타코도, 팔을 벌리며 춤을 추고 앳된 얼굴로 노래하는 그들이 낮은 해상도에 모자이크 처리된 것처럼 보여도 그저 좋았다.


왼쪽부터 다카코, 히로코, 에리코, 히토에



그들의 노래를 죄다 한국어로 옮겨 적고 히라가나와 매치하며 일본어를 혼자 깨치느라 중3 일학기 성적이 조금 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금방 회복되었기에 선생님도 부모님도 잠시의 하락에 대한 이유를 캐묻지는 않았다. 일본노래 들으려 혼자 일본어 공부하느라 그랬다 하면 다들 꽤 난감했을 텐데, 그것도 공부는 공부니까 혼을 내긴 애매했을 텐데 다행히 누구도 잠시의 성적 하락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 덕분에 좀 더 당당하게 스피드의 노래를 듣고 따라할 수 있게 되었고.


하여튼, 김전일과 SPEED와 김민종과 임창정과 SES와 수학 선생님을 좋아했기에 중학교 시절은 너무 바빴다. 가요톱텐과 슈퍼센데이를 챙겨봐야 했고 잡지 스크랩을 해야 했으며 수학 시간이 없는 날은 그의 네모난 등이 보고 싶어 교무실을 가야 했고 숙제와 교환일기도 놓치지 않아야 했는데 그 와중에 고등학교 진학 고민까지 덮쳤다. 그렇게 정신없이 바쁜 어느 날 홍지영이 조용히 물어왔다.


펜팔 하지 않을래, 일본애야.


정확히 십 일 후 오사카의 요코에게서 편지가 왔다. 얼추 히라가나를 읽을 수 있었던 나는 점심시간에도 읽고 자기 전에도 읽고 교복을 갈아 입다가 읽고 화장실에서도 읽었다. 열여섯 살 나와 나이가 같고 오빠가 둘이고 아빠는 은행원인 요코, 비 오는 날을 좋아하고 수학을 잘못해 고민이라는 요코, 한국에 한 번도 못 가봤고 서울이랑 부산이 가보고 싶다는 요코, 일본에 SPEED라는 그룹이 있어, 정말 좋아해, 나는 특히 에리코를 좋아하는데 목소리가 힘이 있어, 너도 좋아했으면 좋겠어, 라고 해서 며칠 동안 나를 설레게 했던 요-코.

답장의 절반은 스피드에 관한 내용이었다. 나도 에리코를 좋아해, 내 친구는 히로코의 목소리가 예쁘다지만 난 에리코의 터프함이 좋아, STEADY는 춤도 출 수 있어, 얼굴도 모르는 너지만 이렇게 스피드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아. 다음에 만나게 된다면 스피드 노래를 같이 불러보고 싶다.

네 장에 달하는 답장을 마무리하기 전에 혹시나 해서 썼다. 스피드를 좋아한다고 하니까, 우리의 취향은 꽤 많이 비슷할지도 몰라. 소년탐정 김전일 알고 있니? 난 김전일도 좋아해, 한국에선 엄청 인기야. 넌 어느 사건을 가장 좋아하니? 나는 김전일이 이렇게 외칠 때가 가장 좋아, 犯人はこの中にいる。너무 짜릿해. 일부러 일본어로 썼다. 내가 얼마나 김전일의 팬인지 보여주고 싶었다. 미유키는 싫다는 말을 쓰려다 말았다. 그건 답장을 읽고 결정해야지, 미유키를 좋아할 수도 있으니까.




2주 후, 하나코의 펜팔을 받은 홍지영은 내게 요코의 답장을 전해주지 않았다. 내 편지는 왜 없어? 몰라, 네 거는 없네. 그렇게 홍지영과 몇몇 아이들은 그들만의 펜팔을 이어갔다. 나는 홍지영에게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나에게 자꾸만 물었다. 요코는 왜 답장을 쓰지 않은 걸까. 이사를 간 걸까. 내 편지를 읽고 답장 쓸 시간이 없었을까. 어디 다친 건 아닐까. 아예 내 편지가 전해지지 않은 건 아닐까, 혹시 바다에 빠지기라도.

다른 아이들이 펜팔을 계속 이어서 하는 걸 보며, 나는 요코를 미워하는 대신 김전일을 미워하기로 했다. 김전일을 쓰지 말아야 했다. 미유키 치마 밑이나 궁금해하고 걸핏하면 미유키 가슴에 얼굴을 파묻는 그런 변태에 대해 써서는 안 되었다. 그런 변태를 좋아하는 나를 변태라고 생각했겠지, 그래서 나를 싫어하게 된 거야. 은행원 집안에서 반듯하게 자란 요코에게 김전일 따위를 들먹이다니.

3학년 2학기 중간고사 이후 처음으로 김전일을 빌리지 않았다. 스피드 노래를 들으면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아 노래도 듣지 않았다. 비디오도 틀지 않았다. 연습장에 요코라고 히라가나로 써 봤다. 아리가또 그리고 고멘네, 요코. 유난히 일찍 단풍이 들기 시작하던 해, 조회대 옆 쓰레기통에 요코의 편지를 올려두었다.


기말고사가 끝났다. 강릉에 있던 명문여고가 아닌 산촌 동네 여고로 진학을 결정했다. 헛헛해서 괜히 만화방을 들렀다. 김전일 시리즈 중 가장 좋아했던 ‘부동고교 7대 불가사의 사건’을 다시 빌렸다. 4년 만에 보니, 트릭과 범인을 알고 봐서인가 꽤 유치했다. 요코에게 지금이라도 답장이 온다면, 가장 좋아하는 사건으로 이건 못쓰겠네 싶었다.


일본의 대중문화가 금이 간 방둑 아래로 새어나오던 물처럼 한국을 적시던 90년대 말, 내게는 김전일과 스피드와 단 한 번의 편지로 내 두 계절을 멈추게 했던 요코가 있었다.





*사진 출처: 순서대로 닭갈비 님의 블로그, 웹사이트 더쿠, 알쏭 님의 블로그




4인 4색, 결 다른 사람들이 글쓰기 위해 모였습니다.

제대로 한번 써보자는 모의이며, 함께 생각을 나누며 어울려 살자는 시도입니다.

주 목요일 매거진에 글로 작당 모의할 예정이니 지켜봐 주시길 바랍니다.

자, 그럼 수작(手作) 들어갑니다~, 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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