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그 음식: 무>
브런치북 발행 규칙상 '작당모의' 브런치북 발행을 위해 제(진샤) 이름으로 재발행을 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이해 부탁 드립니다. 원문은 아래 주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매거진 발행작가: faust(https://brunch.co.kr/@love2060/151)
두 손을 부지런히 놀려 나쁜 과거, 모진 것, 속된 것,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 다 걸러내고, 고상하고 온후하고 때깔 좋은 것만을 쓰려니 쓸 게 없다. 인생에다 글을 갖다 대니 꼴 다 드러난다. 그러니 글이 무섭다. 또 글이 그런 것 같다. 현재와 과거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기억을 걸러내는 보이지 않는 [체] 같은 것. 좋은 기억은 고운 가루가 되어 심상에 남고, 나쁜 기억은 걸러 글로 다시 한번 빻아 좀 무르게 할 수 없을까.
별로 좋지 않은 기억 하나가 글 체에 걸린다. 여기는 강원 양구의 한 신병훈련소. 훈련을 마치고 훈련소 막사로 복귀하는 시간이다. 점심을 먹고 해질 때까지 구르고 뛰고, 뛰고 구르느라 몸은 지치고 배는 고프고 길은 멀었다. 20분쯤 걸었을까. 부대는 ‘폭풍의 언덕’을 걸어서 넘고 있었다. 경사가 가파르면서 길어, 행군해서 넘기가 만만찮은 길이라 이 언덕을 ‘폭풍의 언덕’이라 불렀다. 언덕길 양옆으로 무밭이 펼쳐져 있었다. 수확을 앞둔 무의 파란 잎이 빳빳하게 서 있었고, 땅 밖으로 일각 탐스럽게 드러나 있었다.
훈련소에서 만난 단짝, 춘천 사는 18번 훈련병이 내게 눈짓하며 곁으로 왔다. “야 58번, 줄 맨 끝으로 빠지자.”
“왜?”
“저거 무다. 무우 뽑아 먹자”
아, 맞다. 가을무가 얼마나 맛있는지 난 안다. 우리는 걸음의 속도를 늦추어 줄 맨 끝으로 갔다. 뒤를 살폈다. 뒤에는 아무도 없다. 재빨리 밭으로 뛰어들어갔고, 무 하나씩을 뽑아 다시 줄 끝에 달라붙었다. 무 잎은 꺾어 밭으로 버렸다. 벌써 무의 단내가 코끝에 닿는 것 같았다. 침이 고였다. 이제 무를 먹으면 되는 거다. 앞 열에서 군가 소리가 들려왔다. ‘보람찬 하루 해를 끝마치고서♪ 두 다리 쭉 펴면 고향의 안방♪ 얼싸 좋다 훈련병~’ 우리는 이 군가 음정에 우리 가사를 넣어 불렀다. ‘나는야~ 무우를~ 먹는다구나~한~입 배~어 물~면, 고향의 안방♪’
왜 있지 않은가. 그 프로? 모 텔레비전 개그 프로그램에 갈갈이란 개그맨에 나와서 ‘무를 주세요’ 하고서 무를 세로로 잡고 이빨로 가는 장면, 나는 이미 1987년 난 강원도 양구 방산면 폭풍의 무밭 언덕에서 무를 갈았다. 어머니가 날 나으신 이래 최고로 게걸스럽게 갈았다. 갈갈갈~ 줄줄줄~ 흘흘흘~ 그리고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무의 시원하고 달고 풍부한 즙이 입안에서 퍼지기 시작했다. 첫 한 입의 무가 목구멍을 넘기기도 전에, 한 번 더크게 베어 물었다, 입안은 무만으로 꽉 채워졌다. 아, 노래가 저절로 나온다. 읊조렸다. ‘나는%$#~무를~묵는@$%구나~’
찰나, ‘야! 거기 둘, 뭐하는 거야, 열 밖으로 나온다. 실시!’ 들켰다. K조교다. 멀리서 뒤따라 오던 조교가 이 모든 장면을 본 것이다. 무를 뒤로 감췄다. 그리고 허리춤에 감춘 무를 뒤로 던졌다.
“지금 뭘 처먹고 있어?”
“무ㅂ$%임다.”
“뭐?”
“무ㅂ$%임다.”
“뱉어!”
치사하게 뱉으라니, 이미 입에 들어간 것을 어떻게 뱉나. 넘기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너무 꽉 찬 상태라 쉽게 넘어가지 않았고, 그렇다고 숨 하나도 들어갈 수 없게 베어 문 무를 쉬 뱉을 수도 없었다.
“안 들려? 뱉어!”
“배ㅈ#$어ㄹ%ㅅ가 엄ㅎ임다.”
“뭐라고?”
"제* 에* 송%ㅎㅂ암다&"
"배ㄸ#$어ㄹ%ㅅ가 엄ㅎㅅ&음다.”
뱉을 수 없다. 사실은 입안의 무가 아까워서가 아니다. 뱉을 수 없을 만큼의 꽉 찬 구강 상황이었지만 뱉으라면 억지로라도 뱉을 수 있다. 하지만 뱉을 수 없는 진짜 이유가 있다.
모양 빠져서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 타액과 함께 분출될 무를 생각해 보라. 살면서 이런 남세스러운 장면은 없다. 이건 있을 수 없다.
“뱉어 인마!”
"제* 에* 소0ㅎㅂ암다&, 배ㅈ#$어ㄹ%ㅅ가 엄ㅎ임다"
“뭐라카노 이 새끼가”
퍽!
순간, 그의 오른쪽 훅이 내 두툼한 왼쪽 볼을 강타했다. 타액과 믹스된 무가 허공으로 허공으로 팝콘 터지듯 날았다. 곧이어 춘천 사는 18번 훈련병의 죽통도 그렇게 날아갔다. 폭풍의 언덕에서 벌어진 폭풍 같은 사건이었다. 아프지도 않았다. 미안하지도, 화도 나지 않았다.
그냥 오지게 모양 빠진 날이다.
조교가 말했다.
“니들, 이게 절도인 줄 알아 몰라? 영창 대기하고 있어.”
K조교는 땅딸막한 키에 터질 듯한 빨간 볼에다 오리 궁둥이다. 주머니엔 자주 초코파이를 넣고 다닌다. 우리는 그를 ‘둘리’라고 불렀다. 영창 대기! 이 말을 던지고 휙 돌아서는 조교의 뒤뚱거리는 오리 궁둥이 뒤태에 대고 묵음으로 저주를 퍼부었다. ‘오리 궁둥이 바지 터져 버려라!’
이 위기를 어떻게 모면하나. 막사로 돌아온 춘천 사는 18번 훈련병과 나는 대책 마련을 위해 머리를 맞댔다. 여전히 싱거운 순간이었다. 싱거운? 그렇다. 그와 내가 훈련소에서 친해지게 된 계기도 서로가 싱거운 정신의 소유자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내가 복화술로 교관의 훈시를 따라 하는 걸 보고 반했고, 나는 그가 제식훈련 우향우, 좌향좌 리듬에 맞춰 자유자재로 방귀 뀌는 걸 보고 반했다. 그와 나는 한결같이 싱거웠다. 그날도 극비리에 싱거운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작전은 이랬다. 작전1은 늦은 밤 둘리를 막사 바깥으로 불러내어 폭풍의 언덕 무 절도 사건을 조용히 덮지 않으면 북의 간첩으로 고발하겠노라고 협박한다. 만약 먹히지 않는다면, 작전2를 실행하기로 했다. 작전2는 소원수리(하급자가 조직 내부의 불합리함이나 고충을 알림)에다 K조교 즉, 둘리를 북에서 온 첩자로 고발한다. 작전2가 먹히지 않는다면, 작전3이다. 둘리를 때려 기절시킨 다음, 손발을 단디 묶어 달구지에 실어 북으로 보내고, 그가 소지한 초코파이를 빼앗아 먹는다.
작전을 실행하기 전 그날 저녁이었다. 작전1.2.3을 실행하기 전에 우린 작전4를 실행했다. 작전4는 먼저 교관을 찾아가 잘못을 비는 것이었다. 우리는 교관실 문을 두드렸다. 지금 생각해 보니 딱 덤 앤 더머다. 인간이 보일 수 있는 가장 불쌍한 자세로 용서를 구했다. 억지로 눈물을 짜냈지만 춘천 사는 18번 훈련병의 메마르고 소리만 나는 방귀처럼 흑흑흑거렸다. 교관은 의아한 듯,
"음, 그런 일이 있었구나. K 조교가 그런 말 안 하던데..."
놀랐다. 우린 서로의 동그랗게 뜬 눈을 바라보며 ‘둘리, 오~~~~~~~~~~~~’ 시선으로 감탄했다.
"없던 걸로 하지, 앞으로 그런 일 없도록 해"
교관의 이 말은 산소가 부족해서 숨이 턱 막히는 곳에서 내 쉬는 신선한 한 모금의 공기 같았다. 교관님의 한량없는 은혜로 우리는 구원의 은총을 얻었다.
인생 걸어왔던 걸음을 돌아보면 왜 이리도 지질하고 모양 빠지는 장면들이 많았나 싶다. 생각해 보자, 모양 빠지다란 말, 배드민턴장 김씨 행님은 ‘모냥 빠지다’라고 하는 이 말, 사전 검색해봤더니 없더라. 비속어는 아닌 것 같고, 은어 같다. 얼빠지다. 혼 빠지다. 진 빠지다. 새 빠지다. 쎄 빠지다. 처럼 모양이 빠져서 모양 안 쓴다. 모양 엉망진창이다. 뭐 이런 뜻 아니겠는가.
그렇다 하더라도 자꾸 찾아오는 옛날, 글 체로 한 번 걸러내 봤다. 누가 나쁜 과거를 무조건 나쁘다 하리오. 그런 투박하고 거친 것 걸러 내다보니 무심함과 연민이 생겨 약간은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훅! 한방에 모양은 빠졌지만, 훅, 들어온 메시지 하나는 뼈 때릴 정도로 얼얼하다. 내 생애 둘리 같은 복병도 숱했지만, 분명한 것은 둘리 같은 따끔한 호의도 있었다는 게다. 폭풍의 언덕, 폭풍 같은 사건이 있었던 후, 사는 날 동안 ‘빨강 구두 아가씨 마음 절도 사건’ 이외에 타인의 것을 절도한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자판에 잠시 손 내려놓고 창밖 반야월 하늘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보지만, 생각이 많다는 것과 생각이 깊다는 것은 다를 터, 거추장스런 속박 같은 부끄러운 기억이 많다고 해서 다 의미로 연결되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그 기억 하나하나를 글 체로 걸러보니 세상에는 그냥 존재하는 것만으로, 존재하는 기억만으로 쓰임이 되는 것도 있더라는 것. 그게 모여 모양 빠지는 내가 되고, '브라보 내 인생'이 되더라는 것이다. 부~라보우~~~ 여기 아니면 내가 어디 가서 브라보! 불러보겠는가. 창밖으로 보이는 한 점 구름이 퍽이나 기이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