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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Dec 22. 2022

기아의 크리스마스

< 작당모의(作黨謨議) 크리스마스 특집: 나홀로 집에 >

  


  봄과 여름과 가을은 나름의 소요와 고요가 있다. 자기 몫만큼의 소란을 거치고 나면 다음 계절에게 적정량의 에너지를 넘겨준다. 겨울의 초입까지는 그런 자연스러움이 이어진다. 그러나 크리스마스는 그렇지 않다. 

  크리스마스는 특유의 독성을 지녔다. 온갖 에너지가 이 지구를 뒤덮는다. 열대지방에서도 여자들이 빨간 속옷을 입고 루돌프 코를 하고 돌아다닌다. 힘이 남아도는 게다. 어디서든 시끄럽고 소란스럽고 왁자지끌 하다. 침묵이나 정적, 적요 같은 건 허락되지 않는다. 낮의 소음과 캐럴이 밤에 열 전구의 반짝임으로 이어져 크리스마스 특유의 유독하고 지긋지긋한 분위기로 계속된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라는 기분은 어쨌든 하루만 견디면 된다. 몇 년을 집에서 버텼으니 올해는 그 지긋지긋한 하루를 밖에서 참아내 볼까 한다. 어디든 시끄럽긴 마찬가지고, 그럴 거면 밖이 더 낫지 않나 싶다. 밖에선 어쨌든 시간은 잘 갈 테니까. 


  얼마 만에 밖에 나온 건지 모르겠다. 감각이 없어진 지 오래다. 하늘은 크리스마스의 열기와 다르게 뿌옇다. 눈이 올 것 같지만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뿌연 하늘을 전깃줄이 예술적으로 구획 지어 놓았다. 전깃줄 설치기사는 예술가의 기질을 타고난 사람이었을 거야, 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잠시 한다. 

  이 골목 특유의 칙칙함은 예전과 변함없이 그대로이다. 하긴, 이 칙칙함이 맘에 들어 이 집을 선택했었지. 너무나도 후지고 구려서 나와 어울렸던 동네, 단칸 반지하방. 큰 길이 나올 때까지 걷고 걷는다. 이런 움직임의 기운이 새삼스럽다. 그래 이렇게 움직이던 때가 있기도 했지. 배달 오토바이가 지나간다. 마스크를 쓴 빨간 머리의 여자가 통화를 하며 지나간다. 마스크를 쓰지 않은 아저씨가 담배꽁초를 휙 버린다. 마스크를 써도 쓰지 않아도 괜찮은가 보구나. 집에만 있다 보니 몰랐는데, 역병은 인류에 패배해 버린 모양이었다. 역시 인간은 독한 존재다. 

  지하철 역으로 들어선다. 에스컬레이터는 느리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내려간다. 나를 스쳐 내려가는 사람은 미안하다는 표시도 없고 돌아보지도 않는다. 나 역시 뭐라 하지 않는다. 크리스마스에는 사람들은 바쁘니까, 약속이 있고 할 일이 있고 가야 할 곳이 있으니까. 그 여자는 급하게 내려가다가 발이 꼬여 결국 넘어진다. 아아아악, 아씨. 벌떡 일어서지만 조금 절둑거린다. 아플 것 같지만 나는 괜찮냐고 물어보지 않는다. 그냥 지나갈 뿐이다. 그러게 아무리 급해도 천천히 다녀야지. 

  지하철은 두 정거장 전에 있다고 전광판에 표시가 떴다. 지하철이 저렇게 귀여운 그림으로 표시되었었나. 너무 오랫동안 집에만 있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같은 포즈로 폰을 보고 있다. 모자를 썼고 헤드셋을 썼고, 저건 뭐지? 귀에 꽂혀만 있는 것, 소음방지 귀마개인가, 반짝거리기도 하는데? 어쨌든 무언가를 꽂고 있고 네일 색이 모두 다르고 눈 화장이 다르고 머리 색도 다르고 코트도 가방도 신발도 모두 다르지만 폰을 들고 있는 각도와 눈빛은 비슷하다. 연락 올 곳도 없고 쓰임도 없어 충전도 하지 않아 들고 나오지 않았는데 조금 후회가 됐다. 

  지하철이 들어온다. 빈자리에 앉는다. 역시나 대부분 같은 자세로 폰을 보고 있다. 맞은편 여자는 저렇게 큰 기타를 안고 꾸벅거린다. 기타를 잡고 있는 손이 불안하지만 여자는 졸면서도 잘 잡고 있다. 옆 옆 옆에 앉은 남자는 책을 읽고 있다. 이 둘을 빼고는 모두 폰을 본다. 낯설고 생경스러운 장면들이다. 이런 풍경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라도 가끔 집 밖을 나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이 밀려 들어오는 역에서 내린다. 처음부터 목적지가 없는 외출이었기에 아무 데서나 내려도 상관이 없다. 사람들은 모두 나를 스쳐 지나 간다. 아무렇지도 않다. 오히려 누군가 나를 알아본다면 그야말로 불편한 일이다. 나는 그럴 만한 인물이 아니다. 그냥 투명하게 존재한다. 도무지 이 세상과 친해지는 방법을 알 수 없어서 그렇게 지내지 못한 지 오래되었다. 세상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고아원은 그걸 일찍 깨닫기 좋은 사회였고 나는 다행히 눈치가 빨랐다.

  쇼핑몰로 들어선다. 역병은 인류에 패배했지만 전쟁의 흔적은 남아 실내의 인류는 다소곳하게 마스크를 쓴 얼굴을 달고 다닌다. 인류는 대체로 독하지만 순한 구석도 있다, 지금처럼. 따뜻하고 밝은 쇼핑몰 곳곳에 친절한 미소를 한 마스크들이 배치되어 있다. 나를 본 듯도 하고 아닌 듯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어차피 그들은 나를 붙잡지 않을 테다. 나의 몰골은 차라리 못 본 체하는 게 나을 정도이다. 나를 보았다한들 못 본 체하는 게 그들도 좋고 나도 좋다. 

  미끄러운 쇼핑몰을 미끄러지듯 다닌다. 풍선을 든 아이가 다른 한 손은 엄마의 손을 꽉 잡은 채 울고 있다. 백발의 영감님은 영혼만큼은 젊은 티를 내고 싶은 지 청바지에 힙색을 메고 걷고 있다. 허리고 곧고 허벅지도 단단해 보여 청바지가 꽤 멋지게 어울린다. 검은 양복을 입고 두리번거리는 남자는 검은 안경을 쓰고 검은 마스크를 썼다. 카리스마가 있다. 나는 나의 꼴이 새삼 우습다. 괜찮다, 어차피 나를 보고 신경 쓰는 사람은 없으니까. ‘Happy Holiday’라고 쓰인 입간판이 나를 가로막고 서 있다. 직원을 불러 묻고 싶다, 정말 해피하신가요. 그러거나 말거나 손님 없는 매장의 직원은 열심히 폰을 보며 킥킥대고 있다. 얼마간 행복해 보이기도 한다. 혼혈처럼 보이는 여자는 역시나 혼혈처럼 보이는 딸의 손을 잡고 화장실로 들어선다. 화장실에서 나오던 여자는 손을 옷에 닦다 폰을 바닥에 떨어뜨린다. 케이스가 분리되자 아앗, 하고 작게 소리 지른다. 어디서나 폰이 문제다. 

  카페로 들어섰다. 짙은 커피 향에 잠시 어지러움을 느낀다. 숨이 막히게 하는 사람들의 열기, 이 것이 싫어 카페가 싫고 크리스마스가 싫었지만 오늘 하루는 버티기로 했으니까 참아본다. 커피는 원래 마시지 않았으니 대충 소파와 소파 사이에 비집고 않는다.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는다. 오른쪽의 여자는 태블릿에 그림을 그린다. 공모전인지 회사 제출용인지 모르겠다. 솜씨가 수준급이다. 컵의 얼음이 조용히 녹고 있다. 왼쪽 여자는 끊임없이 전화를 하고 있다. 네네, 아니요, 괜찮습니다, 다음에 다시 연락 주세요, 하고 끊는 여자의 표정은 괜찮지가 않다. 다시 전화를 걸더니 하이, 하이, 소오소오, 혼또오... 하고는 갑자기 흐느낀다. 진짜 울잖아. 어깨를 들썩이며 티슈로 눈물을 닦아낸다. 시커먼 마스카라가 묻어 나온다. 유창한 일본어로 전화를 마친 여자는 다시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어쩐지 일본어보다 더 유창한 것만 같은 프랑스어로 통화한다. 갑자기 쾌활하게 웃는 바람에 모든 사람이 여자를 쳐다보았다. 이래서 사람이 싫다. 종잡을 수가 없고 종잡을 만한 시간이나 기회도 주지 않는다. 모두는 모두를 신경 쓰는 듯 하지만 실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흘낏거리는 시선 속엔 경멸과 업신여김이 적절하게 섞여 있다. 사람은 위선 아니면 무감각이다. 무감각을 뒤집어쓴 위선자들일 뿐일지도 모르겠다. 

  이 혼란을 벗어나야겠다. 맞은편에 대형서점이 있다. 사람만큼이나 위선적인 공간, 서점.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선하고 쿨한 척하는 인간들이 쏟아낸 활자들의 무덤. 서점을 빠르게 지나쳐 간다. 활자들의 아우성과 종이가 뿜어내는 위독한 냄새에 쓰러질 것만 같다. 중고서점의 헌책들은 겸손하기라도 하지 서점의 새 책들은 하나같이 뻔뻔스럽다. 악독한 인류가 덜 악독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들이 책에 있는데 안타깝게도 그 이유로 책에서는 더 위악의 기운이 느껴진다. 서점을 지난 지 오래되었는데도 흉측한 냄새가 내게 남아있는 듯하다. 

  허기가 진다. 푸드몰로 들어서자마자 샤부샤부 집이 보인다. 따뜻한 기운에 이끌려 들어간다. 어떤 음식은 먹지 않고 냄새만으로도 배가 부르는 기분이 든다. 마침 혼자 먹는 할머니가 계신다. 조용히 앞자리에 앉아 드시는 모습을 본다. 할머니와 눈이 마주치자 갑자기 긴장이 된다. 역시 이건 아닌 건가. 그러나 할머니는 이내 고개를 숙여 계속 혼자 드신다. 외로우신 거야,라고 내 멋대로 단정 지어 본다. 할머니가 젓가락질을 멈추더니 ‘불쌍한 것’이라고 읊조리고 다시 젓가락을 고쳐 잡는다. 나는 조금 울적했다가 이내 비참한 기분이 들어 일어서 나와버렸다. 할머니는 계속 먹을 뿐 내가 나가는 방향으로 눈빛 한 번 주지 않았다. 

  지하부터 5층까지 하릴없이 에스컬레이터를 탔다가 복도 의자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생활용품점과 식품점을 기웃거리다 창밖 나무에 알전구가 반짝이는 모습을 보고 건물에서 나왔다.

 

  나무에서는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크리스마스가 도대체 무어길래 나무들은 여름만큼 뜨거운 기운을 견뎌내야 하는 걸까. 왜 인간들은 자기들의 서늘한 겨울을 나무에게 허락하지 못하는 걸까. 나무만큼 인간의 악독함을 견뎌내지 못하는 나는 황망하게 알전구의 치졸한 빛을 바라보았다. 

  캐럴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싸일렌 나잇, 호올리 나잇. 그 음악소리로 인해 크리스마스의 밤은 예수 탄생 이래 사일렌 해본 적이 없다. 아기 예수는 인류를 구원하러 왔으면 구원만 하고 갈 것이지 이 넘쳐나는 행복의 기운도 주고 갔다. 그래서 크리스마스는 무조건 즐겁고 행복해야 한다. 주의 품에 안겨서 감사기도를 드리면 은혜가 넘쳐날 수밖에 없기에, 가식의 후손인 인간들은 다들 비슷한 재질의 피부와 털을 장착하고 비슷한 즐거움을 표현한다. 나의 인내가 담아내기엔 크리스마스는 너무나도 행복한 날이다. 다행스럽게도 얼마 남지 않았다, 성탄의 날이. 


  집을 향하는 골목에 들어서자 숨통이 트인다. 불 꺼진 반지하들은 이른 잠을 선택했다. 밤은 전깃줄을 먹어버렸다. 눈 밝은 고양이가 쓰레기 봉지를 뒤지다 내 쪽을 빤히 바라본다. 해치지 않아, 너의 성탄절은 어땠니, 사랑과 축복으로 가득했니. 고양이는 다시 쓰레기 봉지에 집중한다. 역시, 고양이들이 인간보다 무해하다. 

  공원이라지만 작은 운동기구 세 종류, 벤치 두 개, 나무 몇 그루가 다인 공터에 앉는다. 싸늘한 바람이 분다. 몇 분이 더 지나면 적어도 1년간은 이 터질듯한 열기는 잊고 지내도 된다. 다가올 계절들이 주는 고만고만한, 참을만한 소란들을 생각하니 돌연 행복해졌다. 이 추운 밤을 선택한 아기 예수가 이해가 되는 너그러움마저 생겨난다. 추위 속에서만이 예민하게 감지할 수 있는 작은 온기, 그 감사와 사랑을 깨달으라는 뜻일 테다. 역시 성인은 남다르다. 그는 이 악독한 인류를 구하기 위해 온 독생자가 맞았다. 

  크리스마스가 5분 정도 남았다. 반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에 발을 내딛다 멈칫, 하게 만든 건 유일하게 불이 켜져 있던 방향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남자와 여자는 한 마디씩 저주의 말을 서로에게 던졌다. 너무나도 또렷해서 그들뿐 아니라 나도, 2000여 년 이전 이 땅에 독생자로 온 예수도 다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소리가 절정에 달하면서 서로를 향한 증오의 독기도 최고조로 짙어질 즈음, 둔탁한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악’과 동시에 났다. 으아아아아아악 민주야민주야아아아아아아아아,하는 절규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12시를 막 벗어나는 시간이었다. 크리스마스가 막 지난밤과는 어울리는 소리일까, 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하얀 구급차가 골목으로 들어섰다. 안타까웠지만 어쨌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고, 누구도 저 정도의 불행은 포함하며 지내고 있고, 무엇보다 크리스마스가 지났다. 



  문을 열고 들어서도 센서등 하나 켜지지 않는 나의 방. 거실 한가운데 나는 8년 전의 그날 그 모습 그대로 죽어있다. 나는 나의 시신 아니 백골을 쳐다보는 것에 지쳤다. 집 안 곳곳 스며들었던 시취 또한 날아가버린 지 오래다. 

  유기아. ‘아빠 성씨가 유 씨입니다’라는 쪽지 하나와 기저귀 두 장과 나는 그렇게 고아원 앞에 놓여있었다고 했다. 태어난 지 보름도 안 된 녀석이 당최 울음이 없었다고 했다. 그 때의 나는 이 세상이 별로라는 기분이 강해서 내 울음으로 소음 하나 보태고 싶지 않았다. 기묘한 아이, 라는 뜻의 ‘기아’라는 이름을 지은 건 고아원 원장이라고 했다. 유기아라는 이름은 버려진 나와 울지 않는 나, 어느 쪽에도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나는 이름에 걸맞게 곡기를 끊는 방식을 선택했다. 기묘한 아이로 태어나 굶어 죽는 게 나다운 죽음이라 생각했다. 세상과 나는 좀처럼 친하지 못했고 나는 그런 세상에 굳이 먹을 것을 구걸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인가, 죽은 지 8년이 지나도 세상은 나를 방치하고 있다. 이제는 누군가에게, 손이 따뜻하고 눈길도 손만큼 따뜻한 누군가에게 발견 혹은 발각되고 싶다. 내년 크리스마스에도 나 홀로 집에 있고 싶지 않다. 발각될 방법을 찾기 위해 오늘 집을 나서 보았지만 알아내지 못한 채 이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백골의 내 이마를 쓰다듬어준다. 내년 크리스마스는 집에 혼자 있지 말자,라고 속삭여 준다. 해골의 퀭하게 구멍이 뚫린 눈자위는 어두운 천장 쪽을 향해있을 뿐이다. 

  사이렌 소리가 멀어진 걸 보니 구급차가 골목을 벗어난 듯하다. 



FIN.







*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 다들 즐겁고 축복 가득한 크리스마스 보내시길 바랍니다.

* 대문사진 출처: 진샤 폰 




4인 4색, 결 다른 사람들이 글쓰기 위해 모였습니다.

제대로 한번 써보자는 모의이며, 함께 생각을 나누며 어울려 살자는 시도입니다.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매거진에 글로 작당 모의할 예정이니 지켜봐 주시길 바랍니다.

자, 그럼 수작(手作) 들어갑니다~, 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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