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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Dec 29. 2022

바 소

 


幸福的所在。

한창 외우려 흥얼거리던 노래의 마지막 가사였다. 행복의... 소재, 소재... 소재? 뭐지? 이 깐까를 넘어 깔까름한 기분은? 


오직 널 위해서만 용감해지는 내 사랑을 믿어줘, 행복이 있는 곳을 보게 될 거야.


흠... 행복이 있는 곳,으로 번역되는군. 그러기엔 뭔가..所...

스무 살의 끝자락에 흥얼거리기엔 꽤나 적합한 가사였고 그 와중에 나는 所의 문법적 소용(그렇다.. 所用이다)에 난감해하며 앞의 아름다운 가사들을 중국 대륙 어딘가 내팽개친 것처럼 잊고 있었다. 중국어 사전이 애매하다면 한자사전이지.


所, 바 소


애매함에 애매함을 더하면? 더 애매함.

그때부터 나는 所자만 보면 일단 애매해하기 시작했고 그런 기분은 곧잘 회화나 번역 수업에 있어 고약한 기분으로 이어졌다. 지금이야 간단하게 명사를 만들어 주거나 동사 앞에 쓰여 동사를 강조해주는 식의 조사라고 정리할 수 있지만 갓 중국어를 시작한 내게 '바 소'는 '바소'라는 말처럼 생경하고 그야말로 깐까(尴尬,'난감하다'라는 뜻의 중국어. 발음이 우스꽝스러워 친구들과 수다 떨 때 자주 입에 올렸다. 너 오늘 생김새가 어리를 깐까해, 이 깐까한 상황 어쯜 거야,라는 식으로)했다.





지금의 내 글쓰기를 생각하면 자주 '바 소'가 떠오른다. 이건 뭐지, 알 듯도 같지만 사실 전혀 모르겠는, 이건 도대체 뭐지. 글을 썼다고 이야기하기도 민망할 정도, 기껏 2-3년을 썼다. 나름 글에 진지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름'을 붙어야 하는 수준이다. 육아의 핑계를 댈 수도 있지만 말 그대로 핑계이다. 이런 고민의 글을 쓴다는 것도 사실 웃기지만 어쨌든 고통과 고민은 각자의 몫이 가장 큰 법이니까, 이 고민도 (나름) 심각하여 이렇게 쓰고 있다. 

시를 좋아한다고 떠벌리고 다니지만 그러기엔 시를 읽은 마음과 시를 좋다고 말한 마음 사이의 휴지기가 너무 길었다. 소설을 읽고 있어요,라는 말은 사실이지만 읽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아 많이 조급하다. 화장실에 앉아서도 단 몇 줄을 읽겠다고 들고 간다. 내 안에 떠오르는 이야기들이 소설이 될 수 있을까,라는 의심들이 대부분 의심 그 자체로 굳어버린다. 에세이나 수필은, 내 어느 구석을 들춰보는 시간과 작업이 깐까해 함부로 하지 못하고 있다. 그야말로 '바소'같은 상황이다. 무엇이든 대충은 알겠는데, 그 이상은 알지도 못하고 설명은 더더욱 하지도 못하고 그리하여 내 모든 글들이 하나같이 애매한.

글은 어떻게든 쓴다. 시는 시대로, 소설은 습작이랍시고, 에세이는 그나마 편하니까 편한 대로. 쓸 때만큼은 일필휘지다. 머릿속에 그득하던 것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지금처럼. 그러고 나면 내 하찮은 글쓰기 인생에 유례없던 질문들을 던지는 것이다. 이게 정말 시가 될 수 있을까, 이건 소설도 뭣도 아니지 않나요? 수필도 에세이도 아닌 이 잡문의 정체는 무엇인가요, 네? 말 그대로 잡문이라고요? 전 수필이라고 생각하고 썼는데요... 아... 다시 읽어 보니 뻘글 맞군요...

 

불교적 사고관이나 세계관을 갖고 있으면서도, 연꽃을 들어 보이자 가섭만이 그 뜻을 알아채 석가의 적통?! 이 되었다는 아리송한 이야기로 가득한 선불교는 싫다. 화두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다 딴 데로 잠시 샜다. 선불교는 싫지만 삶의 중심이 되는 묵직한 질문 하나씩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 요즈음 나의 화두는 단연 '바 소'이다. 나의 글쓰기가, 좋게 말하면 여기저기 갖다 붙일 수 있지만 나쁘게 말하면 이도저도 아니라는 생각에 자꾸 작아지는 나날이다. 시는 은유와 환유 사이에서, 소설은 서사와 묘사의 긴장감 속에서, 수필이나 에세이는 나를 내보여야 한다는 익숙한 부담감 속에서 길을 잃었다. 커다란 미로, 그 미로의 이름이 '바 소'이다. 어서 오세요, 바소미로공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다시 所를 들여다본다. 한자사전에서는 '일의 방법이나 방도(바), 것, 곳, 지역, 처소, 지위, 자리, 위치' 정도의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중국어 사전에서는 크게 두 가지로 확인된다. '장소, 곳'이라는 명사적 용법과 동사 앞에 놓여 '-하는 바, 동사의 명사적 성분으로 변용'의 쓰임을 갖는 조사적 용법을 지니고 있다. 


어떤 장소(場所). 

동사의 쓰임을 다양하게 해주는 조사: -하는 바, -하는 곳, -하는 것.


이건 너무나도 정확하게, 지금의 나의 글쓰기에 대한 설명이지 않은가! 필요한 건 단 하나, '쓰다'라는 동사이다. 

나의 글들이 놓인 장소는 어설프게나마 '글' 이다. 나의 글들이 처해있는 장소로서의 무대, 글.(문학, 이라고 쓰고 싶지만 어쩐지 부끄럽다) 이곳이 아니면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지금의 나를 굳이 설명하자면 '글을 쓰는 바 글을 쓰는 곳에서 글 쓰는 사람'인 어떤 영혼이다. 그야말로 '바소所'로서, '바소所'로만이 설명할 수 있는 상황과 장소와 존재이다. 

아직 나의 글쓰기는, 중국어를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아 난감하고 애매하여 대체로 곤란하고 고약해지는 그러한 상황과 비슷한 수준이다. 이제야 내가 그 무엇도 알지 못함을 알게 된, 그야말로 어떤 단계들이 펼쳐져 있는지 문을 열어본 것에 불과하다. 그 문고리에는 '바소'라는 명패가 걸려 있어 나는 갸우뚱했고 문을 열어보고 나서야 그 명패의 의미를 간신히 이해하게 되었다. 

다행이다. 시집은 손 닿는 곳마다 있고 소설집들은 침묵한 채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다급한 건 읽어야 할 차례를 적어둔 나의 리스트와 마음뿐이다. 브런치의 수많은 에세이와 수필들은 거의 매일 내게 따뜻한 벼락같은 가르침을 줄 준비를 하고 있다. 

지금 내가 처해있는 곳所處에서 나의 글쓰기, 나의 글이 어떠한 소용所用을 가지게 될 지만을 생각하며 쓰면 될 일이다. 지금의 이러한 흔들림所動 또한 지나고 나면 과정 중에 반드시 요구되는 바所要였음을 깨치게 될 것이다. 마치 지금의 내가 스무 살의 나처럼 '所'를 생각하지 않듯이, 나와 내 인생과 내 글이 무르익을 때에는 이 화두도 버려지거나 다른 화두로 바뀌어 있을 것이다. 별 거 없다, 그때까진 그저 쓰고 또 쓸 뿐이다. 



글을 쓴다,라는 단 하나의 마음으로 써나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지금의 내가 필요로 하는 바이다. 

写文章、用这仅有的一个心情来写作文,
这就是如今的我真正所需要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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