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Vijay Dec 26. 2020

오늘~ 개교기념일이에요.

개똥 철학자의 가출 (4)

내 기억 속의 월악산은 네 발로 기어 올라간 곳이다. 몇 시간이 지났는지 정상이 얼마나 남았는지도 헤아릴 정신이 없었다. 그저 손이 발이 되어 꾸역꾸역 기어 올라가고 있었다. 당연히 도시락도 물통도 없었다. 얼마나 올라갔을까? 탈수 직전에 다행히 약수터가 나타났다. 아침에 먹은 국밥은 꺼진 지 오래였다. 약수를 드리 부어 텅 빈 위장을 꾹꾹 눌러 채웠다. 등산 꽤나 하는 한국 아저씨들의 오지랖을 피하는 방법은 별로 없다. 53kg 삐쩍 마른 앳된 남자 애가 혼자 험산 중턱에서 약수로 배를 채우는 모습을 프로 명산 등산러 아저씨들에게 들켜 버리고 말았다. 아저씨들은 예의, 존댓말 따윈 산속 멧돼지에게나 줘버린 것인지 대뜸 반말로 치고 들어왔다.


"야~ 너 몇 학년이야? 오늘 평일인데 어떻게 산에 왔어? 혼자 온 거야?"


 "아, 네.. 혼자 왔어요. 오늘 개교기념일이에요! 산 엄청 좋아해서 혼자 왔어요."


거짓말도 재능인가 보다. 위기의 순간마다 찰떡같은 거짓말이 떠오르니 말이다. '개교기념일'은 마법과 같은 힘을 발휘했다. 순식간에 난 프로 등산 아저씨들의 인기 고교남이 되었다. 산을 얼마나 좋아하면 개교기념일 딱 하루 쉬는 날 혼자 등산을 오냔 말이다. 산에 가자 애원을 해도 따라오지 않는 방구석에 쳐 자는 자기 자식들이 떠오른 게다. 그에 비하면 세상에 이런 기특한 고등학생을 어디서 본 적이나 있겠냐 말이다. 아저씨들은 가방에서 주먹밥과 먹을 것들을 꺼내 주었다. 먹을 것을 조금씩 나눠주며 친절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야! 산에 올 땐, 마실 것이랑 먹을 것을 잘 싸와야 해. 많이 안 다녀봐서 몰랐지."


주먹밥은 정말 꿀맛이었다. 그렇게 또 허기를 채우며 나는 월악산 정산에 올랐다. 그런데 그 정상의 풍경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비가 왔었는지, 맑았는지, 시원했는지, 더웠는지, 바람이 불었는지, 풍경은 어땠는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월악산 중턱에서 배가 터지게 마셨던 약수와 꿀맛 같았던 그 주먹밥... 그리고 주먹밥을 건넸던 프로 등산러 아저씨들 만이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러고 보니 내 기억은 이미 알고 있었다. 어떤 여행은 미지의 장소에 가는 것보다 미지의 사람들을 통해서 내게 각인된다는 것을.

매거진의 이전글 혹시, 주민등록증 있어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