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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봄 Sep 24. 2020

1. 다시 먹고 싶은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

아버지의 손은, 거친 삶의 흔적이 묻어있었다. 무뚝뚝하고 일밖에 몰라 사람 상대하기를 어려워했던. 생계를 위해 장사를 할 수밖에 없는 생활인. 진일로 갈라지고 터버린 아버지의 손은 나의 볼을 쓰다듬곤 했다. 그 까칠한 손으로 내게 주로 닭 요리를 해주셨다. 복날엔 국물이 진한 백숙, 쌀쌀할 땐 칼칼한 닭볶음탕, 별식으로 닭 염통이나 모래주머니 볶음도 종종 만드셨다.     


아버지는 20대부터 남대문 시장에서 일했다. 토큰 박스에서 버스 승차권, 껌, 과자 부스러기를, 리어카를 끌며 삼립식품 빵도 팔았다. 1980년대 그곳은 활력이 넘쳤다. 아동복과 그릇을 파는 도매상은 배달할 물건을 길가에 수북이 쌓아두었다. 새벽녘 리어카는 바큇살이 보이지 않았다. 서너 개의 봇짐을 어깨에 들쳐 매고, 수레 가득 짐을 실은 짐꾼들은 거리를 질주했다. 그들은 서커스 단원 같았다. 지도 없이 배 달지에 정확히 전달하는 모습은 묘기의 한 장면이었다. 남대문 시장은 수입 상가로도 입소문을 탔다. 미군 부대에서 빼돌린 물건과 배를 타고 넘어온 일제 상품들은 숨겨둔 보물 마냥 알음알음 거래됐다. 가는 곳마다 붐볐고 낮부터 아침까지 북새통이었다. 무미건조한 도시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사람 냄새나는 그때의 시장이 떠오른다.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은 아빠가 20년 가까이 닭튀김을 판 가게 이름이다. 내가 그곳을 기억하는 이유는 허름한 5평 남짓의 무허가 건물이기도 했거니와, 내가 대학생이 된 후에도 아빠는 홀로 가게를 꾸렸기 때문이다. 상호도, 설명도 없는 간판은 '이곳은 치킨집이오. 더는 묻지 마시오.' 하는 듯했다. 본질에 충실했지만 투박했다. 아빠도 간판 같았다. 본인을 챙길 줄도, 싫은 소리를 할 줄 몰랐으며 묵묵히 하는 일이 전부인 것처럼 살았다. 요령보다는 성실이 전 재산인 양, 1년에 쉬는 날은 고작 이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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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박한 아빠의 치킨은 세련된 맛이 났다. 준비 과정을 허투루 하지 않았고, 들어가는 양념의 가짓수가 많아서다. 통닭집의 하루는 오후 3시쯤 출근해 배달된 생닭을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봉지에 담긴 닭들을 크고 둥근 대야에 담아 흐르는 물에 손질한다. 닭의 상태를 살피고 가위를 들고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다. 양념은 18가지나 들어간다.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숫자 열여덟이 생각나는 이유는. 닭을 재우는 건 아빠의 자랑이었기 때문이다.


아빠는 가끔 '내가 이 양념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데'라며 사람들에게 맛이 어떠냐고 물었다. 요즘은 염지라고 한다. 예전에는 딱히 첨가제가 없었기에 닭을 재우는 방법은 그 업소의 노하우였다. 카레 가루, 사과, 배, 소주, 후추, 우유, 튀김가루 등을 넣고 닭과 함께 버무다. 여러 번 휘저을수록 양이 고루 입혀다. 당시에는 압력 튀김기를 사용했는데, 네모난 뚜껑이 있는 기기는 '삐삐~삐삐~' 소리로 조리 시간을 알렸다. 어린 시절 나에겐 이 기계가 괴물 같아 보였다. 손잡이를 돌려 상판을 들어 올리면, 소낙비 소리와 튀김 냄새가 섞인 흰 연기를 내뿜다. 사방을 뒤덮고 나를 위협했다. 마치 물안개가 가득한 무서운 놀이기구를 타는 기분이었다.

    

닭을 다 튀기면 오후 6시. 장사를 시작한다. 초벌 한 닭튀김은 손님이 오면 다시 튀겨 판매한다. 포장지는 '후라이드 치킨'이라 적힌 손잡이가 달린, 갈색 종이 쇼핑백이었다. 그 봉투에 치킨무 한주먹, 후추를 섞은 소금 한 꼬집, 케첩과 마요네즈를 뿌린 양배추를 튀긴 닭과 담아냈다. 요즘 치킨집과 별반 다르지 않다. 아쉬운 부분은 치킨무와 양배추다. 우리 가게는 치킨무도 직접 만들었다. 깍둑 썰기한 다듬은 무에다 신화당과 식초 등을 넣었는데 새콤달콤함이 남달랐다. 근래에는 양배추 샐러드를 제공하지 않는 업소들이 많아졌다. 김밥에 단무지가 빠진 느낌이다.


작은 홀에는 4개의 테이블이 있었다. 주로 거친 시장 상인들이 술잔을 기울이기 위해 들락거렸다. 술장사는 우여곡절이 많다는 걸 그때 알았다. 술 마시는 손님들과 실랑이도 잦았고 외상도 심심치 않았다. 아빠는 그렇게 사람들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소주로 풀었다. 치킨 장사를 시작한 아빠는 올빼미가 됐다. 새벽녘에 들어온 아빠의 한 손에는 팔다 남은 치킨이 들려있었다.   

  

난 아빠를 몰랐다. 아니, 알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남대문 시장에서 일하기 전에 충무로의 한 인쇄소에서 일했다는 것을. 집안의 생활고로 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는 것도. 어릴 시절부터 일에는 이골이 나있었고, 가슴 한편에는 학교를 다니지 못한 설움이 배어있었다. 그것도 조문을 온 당시 인쇄소 사장님이라는 분이 알려주셨다. 그 후로 한참을 먹먹했다. 아빠는 못 배운 게 한이라며 부당한 일도 참고 살았다. 그래서 자식은 본인과 같은 삶을 사는 걸 바라지 않았던 것 같다.     


퇴근길에 내 손에 든 치킨 봉지를 보면 아빠가 그리워진다. 고등학생 때로 기억한다. 통닭을 먹고 싶다는 친구들의 성화에 무작정 아빠의 가게로 쳐들어갔다. '우리 아들 친구냐며 많이 먹고 가라고', 나와 잘 지내라는 당부였다. 아빠가 듬직했다. 그런 뭉클한 감정으로 아이와 닭을 먹을 때면, 아이는 '아빠는 치킨을 참 좋아한다'라고 핀잔을 준다. 아빠가 장사를 그만두고, 새로운 치킨이 나오면 시식하지만, 아직 그때의 맛을 찾을 수 없다. 비슷한 맛을 찾기도 힘들다. 일 밖에 몰랐던, 무뚝뚝한, 부족한 나를 그리 자랑스러워했던, 매일 새벽 무거운 어깨로 들어온 아빠. 그 시절의, 아빠가 만든 치킨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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