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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봄 Oct 07. 2020

7. 한글날, 한글의 아빠는?

내가 글을 쓰는 이유


퇴근길에 버스를 타고 한 정거장을 더 가서 내렸다. 딴생각을 하다 정류장을 지나쳤다. 집까지 거리는 3킬로 남짓 잰걸음으로 40분 정도였다. 가는 길에는 순환 고속도로를 가로지르는 100 미터 정도의 터널이 있었다. 할로겐 등은 터널 벽에 부착돼 누렇고 탁한 빛을 내뿜었다. 혼자 그 속을 지날 때 발걸음 소리가 유달리 컸다. 바닥은 눅눅하고 축축했다. 발길을 내디디면 저벅대는 음파는 벽을 때려 증폭되어 귀속을 파고들었다. 터널 천장 모서리엔 물줄기가 벽을 타고 흘렀다. 전날 비가 왔는지 작은 틈 사이로 물방울이 똑, 똑, 떨어졌다. 길 끝에는 어둠이 비쳤다. 늦은 시각 그 끝은 동굴 입구처럼 또 다른 암흑으로 나를 기다렸다.



유년시절 기억은 터널 중앙 걷는 느낌이었다. 멀리 보이는 미래는 캄캄하고 지나온 과거는 흐리터분했다. 기록하지 않으면 추억할 수 없었다. 어린 시절 친구나 머무른 동네는 기억하지만, 생활습관은 떠오르지 않았다. 어렴풋한 기억이 의문으로 남았지만, 물음은 갈 곳을 잃었다. 아빠는 12년 전 세상을 등졌는데, 무뚝뚝해 장 과정을 말해주진 않았다.


한 가지는 선명하게 기억한다. 나는 반찬투정이 심해 투덜거렸다. 아빠는 끼니때마다 호되게 꾸짖었다. 쌀 한 톨이 귀하다고 했으나, 그마저도 말을 안 들으면 밥그릇을 빼앗아 굶으라고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밖에 나가 뛰어놀았다. 친지들이 주로 입에 올리는 단어는 '까분다'와 '천방지축' 이였다. 호기심은 많았지만 제멋대로라 어른한테 많이 혼났다.



아이를 키우며 어린 내가 떠올랐다. 신체적인 면은 가깝더라도 독특한 습관이 아이에게 비칠 때면, 거울을 보는 것 같았다. 아이는 나를 닮아 밥을 잘 안 먹었다. 야단맞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다. 우쭐대다 무섭다고 달려오고, 허풍을 떨다 어색하게 웃다.


식후 조는 것은 20년 묵은 습관이다. 봄철 쉽게 잠이 오는 춘곤증과는 다르다. 위에 포만감이 생기면 피로감이 몰려와 무의식적인 졸음이 쏟아다. 아이는 밥을 먹다 존다. 저녁 식탁에서 고개를 꾸벅이면, 나는 화를 내다 체념 섞인 한마디를 던진다.

"어휴, 부전자전인가 보다~"

비슷한 일이 몇 번 발생하자, 아이 또래의 내 모습이 궁금다. 양육은 사전적 의미로 아이를 보살피는 것이지만. 양육은 나를 다시 돌보는 계기로 다가왔다.


나는 아이가 어린 시절을 회상할 때 답답하지 않길 바랐다. 사진으로 풍경과 표정을 담고, 포토앨범을 만들어 문구를 넣었지만. 기억의 단편이었다. 감사편지는 감사를 가장한 강요 같았다. 아이가 말을 트자, 이야깃거리가 생겨났다. 그림을 그려 설명하고, 친구들과 경쟁에서 이겼다며 신나 했다. 가끔은 엉뚱한 상상으로 웃음을 준다.



아침 식사를 하며 "음악의 아빠는 바흐고, 음악의 엄마는 헨델 이래"라고 얘기했다. 아이는 고개만 끄덕였다.

저녁에 아이가 묻는다.

"아빠, 아빠 한글의 아빠가 누구라고?"

"응? 뭐라고? 아... 세종대왕??"

"그럼 엄마는?"

"음... 집현전?...이라고 할까?"


그 상황이 소중했다. 아이에게 일상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말주변이 없다. 언어는 조리가 없고, 시간 흐름은 뒤죽박죽 었다. 고민 끝에 말을 뱉어내면 대화의 맥은 끊겼다. 어조는 건조하고, 어투는 딱딱했다. 경청을 원했지만 돌아오는 건 딴청이었다.


공유한 시간을 기록하기로 마음먹었다. 어휘만을 나열하고 주어도 없는 서술어를 끼적댔다. 상황은 떠올랐지만 단어는 문장이 되지 못했다. 생각은 떠다니는 구름 같아, 부풀려진 기억을 손으로 허우적대지만 실체는 잡히지 않았다. 낱말을 조합해 문장을 쌓았지만 속마음은 전해지지 않았다. 주위를 관찰하고 내 생각을 덧붙였다. 경험을 복기하며 문장을 지어냈다. 부족한 문장은 문단으로 변하고 조금씩 쌓여 글이 되어갔다.


한식 같은 글을 쓰고 싶다. 소탈한 된장찌개 백반이 적당하겠다. 모락모락 김이 오른 공깃밥은 글의 내용이 되어 온기를 전하고, 구수한 된장은 밥을 비비듯 문단을 구성하여 맛을 살리고, 갖가지 반찬은 식탁을 풍성하게 만들듯 은유와 비유로 표현이 풍부한, 소박히 차려진 집 밥 같은 글이라면  좋겠다. 전문 요리사가 만든 맛있는 음식은 별식이지만, 내가 만든 소박한 한 끼는 언제 먹어도 부담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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