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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봄 Oct 26. 2020

9. 독서의 어려움

책만 보면 졸려요

 그는 탁상 앞 의자에 기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숨소리는 새근거린다. 내리깔린 눈꺼풀 안쪽에서 눈동자가 움직인다. 책 한 권이 가슴에 올라 불룩한 아랫배에 걸쳐있다. 도서 표지는 검은색이고 흰색글자로 '서양미술사'라고 쓰여있다. 양팔은 책과 복부를 동시에 감싸고 있다. 시간이 지나자 창밖엔 어스름이 깔리고 집안 조명이 흐른다. 왼쪽 팔이 떨어지며 미간 사이는 좁아진다. 굽힌 고개를 젖히며 실눈을 뜬다. 멍하니 베란다를 응시하다 생수병을 들어 꼴깍거린다. 머리를 도리질한다. 의자에서 일어나 외투를 두르고 기지개를 편다. 산책을 나가는 것 같다.


 아파트 출입구를 나온 그는 평범하다. 두상이 좀 큰 걸 제외하면 외항은 대한민국 40대 남자 평균에 부합한다. 키는 175정도이고 배가 나왔다. 자세히 봐야 몇 가지가 눈에 띈다. 노을에 반사된 얼굴은 까무스름하다. 스포츠 머리카락으로 짧다. 두발은 잔디 인형처럼 뻗쳐있다. 얼굴은 마치 4절지 도화지 같았다. 이마는 튀어나와 번들거리며 윗부분은 숫자 3 모양이 도드라진다. 눈썹은 짧고 옅은데,  그 사이는 넓은 편이지만 안경으로 공간을 메꾼다. 동공엔 검은색이 선명하고 눈꼬리는 아래로 약간 처졌다. 콧등은 뭉툭하며 인중은 진한 갈색이다. 왼팔에는 책 한 권이 들려있고, 손등에는 힘줄과 파란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 계단에서 잠시 두리번거린다. 양쪽 귀에 푸른색 이어폰을 찔러 넣고, 검붉은 위아래 입술을 다물어 깨문다. 집 앞 하천으로 발길을 터벅터벅 내딛는다.



 어둠이 내린 산책로에 들어선 그는 반딧불이 같다. 한 손에는 책을 펴고 고개는 숙이며 가로등 불빛을 찾아, 발걸음은 가다 서다를 반복한다. 가로등에 비친 겉모습은 왜소한 편이다. 어깨가 키에 비해 좁고 10도 정도 굽어있어 더 작아 보인다. 그것 때문에 상대적으로 팔다리가 길고 얇게 느껴진다. 오른손 중지 끝은 축 늘어져 바지춤에서 시계추처럼 오간다. 걸친 옷은 무채색이다. 목 부분이 늘어난 회색 긴팔 티셔츠, 통이 넉넉한 십 일자 흑색 운동복 바지, 색이 바랜 나일론 원단 검정 외투를 입었다. 검은빛 운동화 때문이었을까? 전신이 어둠에 묻힌듯했다.


 이동 중에 개천이 보인다. 개천 깊이는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 무릎 정도이고 유속은 이끼닐 정도로 느렸다. 산책로는 개천을 사이에 두고 양옆으로 갈라진다. 그는 목을 기울여 종이와 보행 안내선을 번갈아 보며 나아간다.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행인과 충돌했다. 그는 지나가는 사람의 옆모습을 흘겨본다. 입술 한쪽을 살짝 씰룩이다 혀를 찬다. 반대편 산책로가 한적한지 가늠하다 다른 길로 향한다. 숙인 머리가 규칙적으로 끄덕이는 걸로 보아 음악을 듣는 것 같다.


 눈동자는 리듬에 맞춰 글자를 읽어나간다.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들으면서 주변이 숲 속 오솔길이라고 착각한다. 새들이 지저귀는 숲 속 같지만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뛰었다. 잠시 멈춰 휴식을 취하는 기분이다. 리시버에선 박수 소리가 나오고 같은 작곡가의 바이올린 협주곡 35번이 흘러나온다. 머리는 바이올린의 활처럼 좌우로 흔들린다. 박자가 빨라지자 시선은 템포를 따라간다. 음악이 최고조 부분인 6분 30초에  다다르자, 잠시 걸음을 멈춘다. 책과 함께 음악속으로 눈빛이 빨려 들어갔다. 눈매는 날카로워졌다.


 느릿한 걸음으로 40분 정도 지나자 한강둔치에 다다른다. 크게 심호흡을 하자 비릿한 강바람 냄새가 전해진다. 의자에 앉는다. 잔잔한 물결을 향하던 시선은 빛을 받아 초점이 흐트러진다. 멍한 그는 생각한다. '나에게 독서는 참 쉽지 않은 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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