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봄 Dec 05. 2020

15. 일주일 동안의 퇴직 체험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한 잠시 멈춤

5년 전 이직하면서 공백이 생겼다. 첫 출근은 12월 1일이었는데, 가기로 한 회사에서 하루 전에 내부 사정으로 출근 일자가 일주일 가량 뒤로 미뤄졌다. 7일간 실업자가 됐다. 20살 중반 이후로 5,6번 회사를 옮겼지만 소속이 없기는 처음이었다. 계획되지 않은 휴가는 기쁨보다 당혹감을 일으켰다. 일종의 간절히 바라던 물건을 지나가는 길에서 주워서 가치의 소중함이 저하되는 느낌이랄까. 타의로 부여받은 휴가는 다른 사람과 일정을 잡기도 힘들어 오롯이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했다. 의례 일주일 휴가는 상사 눈치를 보며 다녀오기 마련인데, 막상 시간이 주어지니 뭘 해야 할지 몰랐다. 같은 일상이 너무 익숙해진 탓일까. 평상시 하고 싶은 일들은 머릿속에만 맴돌았다.



갑자기 주어진 휴가는 은퇴 이후의 삶을 체험하는 것 같았다. 은퇴를 하려면 20여 년 넘게 남았지만, 미리 겪는 느낌이었다. 출근 시간에 집에서 나와 다니던 회사 방향으로 발길을 옮겼다. 회사 건물을 멀뚱히 보다 근처 공원에서 산책을 했다. 걸으면서 '내가 지금 뭘 하고 싶은 거지?'라는 의문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만큼 아무 생각 없이 바쁘게 살았다는 반증이었다. 공원 몇 바퀴를 돌자 마주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머리가 희끗한 분들 사이로 앞서가니 뒷서가니 움직였다. '20년 후 내 모습도 비슷할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해가 중천에 뜨자 배 속은 꼬르륵거렸다. 아침을 거르기도 했거니와 계속 걷기만 해서였다. 문제는 식사였다. 분주한 점심시간에 혼자 자리를 차지하기도, 멀뚱히 핸드폰을 바라보며 밥을 먹기도 싫어해 굶었다. 라면이라도 먹을 요량으로 찾은 곳이 도서관이었다. 보고 싶은 책 두어 권 빌려 열람실에서 허기를 참아가며 앉아있었다. 몇 시간쯤 지났을까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밥 냄새가 식욕을 자극했다. 저녁시간의 분주함을 피하기 위해 4시 반쯤 식당으로 가서 라면을 하나 시켜 빠르게 흡입했다. 왠지 일 안 하고 밥을 먹고 있으니 '밥만 축내는 사람' 같아 위축됐다. 저녁시간을 훌쩍 넘겨 도서관이 닫을 때쯤 집으로 향했다.



'나는 이 쳇바퀴를 만들기 위해 그토록 열심히 살았다. 특별한 하루라는 것은 평범한 하루들 틈에서 반짝 존재할 때 비로소 특별하다. 매일이 특별할 수는 없다. 거대하게 굴러가는 쳇바퀴 속에 있어야지만, 잠시 그곳을 벗어날 때의 짜릿함도 누릴 수 있다. 마치 월요일 없이 기다려지는 금요일이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 <보통의 언어> 김이나


내게 그 일주일은 운전을 하다 급제동을 한 것처럼 일상이 '정지'되는 순간이었다. 정해진 틀에서 공과 사의 불균형이 심해 항상 일이 먼저였다. 일에 대한 부담감이 사라지자 내게 찾아온 것은 공허함이었다. 빨리 처리해야 할 일도, 찾는 이도 없었다. 그전까지의 고민은 좀 더 나은 직장, 수입, 주거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성인이 되고 처음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회사원, 아빠, 남편, 아들로서의 내 역할과 책임에 대한 고민이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그저 발길 닿는 대로 무작정 걸었다. 시간은 늘어진 테이프를 튼 것처럼 더디 흘렀다. 중압감이 없는 상황은 주변을 관찰하게 만들고, 같은 길도 다른 풍경으로 다가왔다. 지나치는 사람들의 표정, 보도블록 사이로 피어난 잡초의 생명력, 앙상한 가지 끝에 덩그러니 남겨진 감을 품고 있는 나무, 뺨을 에이는 찬 바람 소리는 생동감을 전했다.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리긴 쉽지 않다. 지금 생각해보면 기차 정거장에 잠시 내려 휴게소에서 국수나 한 그릇 먹고 가는 것처럼 특별한 시간이었다.


어느덧 2020년 12월이다. 사건사고가 많았던 올 한 해, 현재 사회적 거리두기 격상으로 인해 '잠시 멈춤'하고 있다. 언제 상황이 종식될지 예상할 순 없지만 당분간 지속될 거라고 한다. 5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시간이 느리게 흐르고 있다. 올해는 새해 계획과 지나온 한 해의 반추를 좀 오래 해도 될 것 같다. 지금을 한주를 마무리하는 금요일 저녁이라고 생각하자. 새로운 월요일을 위해 나를 돌볼 시점이 아닐까.


    


작가의 이전글 14. 크리스마스 선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