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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좋을 사람 Aug 10. 2021

늘 모자라고 부족한 유치원 교사의 삶.

선생님은 왜 맨날 맨날 뒤로 걸어요?

며칠 전, 컴퓨터에 저장해 두었던 사진들을 하나씩 다시 보았다. 내 품을 벗어난 아이들의 사진이었다. 사진 속 아이들은 이제 한 손으로는 셀 수 없는 시간이 지나, 교복을 입는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사진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자그마한 아이들의 높은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나도 모르게 실실 거리며 웃다가 문득 앞으로도 내가 아이의 이름과 함께 떠올릴 모습은 6살짜리의 동그란 얼굴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때 그러지 말 걸. 한 번 더 안아줄 걸. 한 번 더 참을 걸. 한 번 더, 한 번만 더... 수천 번도 더 했을 후회의 말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어쩌면 수천 번이 아니라 수만 번쯤 될지도 모르지. 아이들과 함께 했던 하루에도 몇 번씩, 아이들을 만나지 않는 날에도 끊임없이, 현장을 벗어난 지금도 종종 뒤를 돌아보면 가장 많이 하는 생각들이니까.


당시의 내가 아이들에게 대충 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때로는 너무 힘들어 울면서 도망가고 싶었던 날들 속에서도 나는 정말 열심히 했는데, 그 순간에 정말 힘들었는데, 그럼에도 해냈으면서 왜 늘 나는 모자라고 부족하게만 느껴질까?





사실 대단한 실수를 하거나 잘못한 것이 아니다.

아이의 말 한마디 더 들어보지 못한 것, 아이에게 한 번 더 따뜻하게 물어보지 못한 것, 아주 잠깐이라도 더 기다려주지 못한 것, 아이를 조금 더 안아주지 못한 것.

이런 것들이 돌아서고 나면 그렇게 후회가 되었다. 그래서 더 스스로가 못나게 느껴지고는 했다. 그게 뭐라고, 뭐 어려운 일이라고 나는 그렇게 못했을까 하고 말이다. 그렇게 하루에도 몇 번씩 스스로의 모자람에 속상해했다. 왜 그러지 못했는지 스스로 가장 잘 알고 있으면서도 늘 속상했다.


홧김에 친구를 때리고, 의도적으로 수업을 방해하는 아이를 막았다. 말을 해도 달라지지 않는 행동에 조금 더 단호하게 말했다. 한 명의 행동에 다른 아이들이 불편해하는 상황이 이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한 명의 아이와 이야기가 길어져 다른 아이들이 방치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나의 마음은 조급해졌다. 아이는 친구에게 사과를 하고 굳은 얼굴과 몸짓으로 잠시 차분해졌다. 그러면 내 마음은 더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 아이는 이른 아침 출근해서 늦은 밤이 되어서야 부모님이 돌아오는 맞벌이 가정의 아이였다. 기운이 없는 조부모님 외에 돌봐줄 수 있는 어른이 없어서 유치원 종일반을 마치고도 학원으로 가던 아이였다. 학원이 끝나고 나면 홀로 동네 놀이터를 돌아다닌다는 아이였다. 어느 날 몸을 부르르 떨 정도로 씩씩 거리며 부모님은 나를 화나게 하고, 친구들은 나를 슬프게 만든다던 아이였다. 그러면서도 애교가 많고 사람을 좋아하던 아이였다.


지금도 그 아이가 어떤 표정으로 웃었는지 기억난다. 부끄러워할 때는 어떤 표정과 몸짓이었는지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잔뜩 화가 나서 씩씩거리다 두 눈이 벌게져서 울던 얼굴은 절대 잊히지 않는다. 아이에게 팔을 뻗으면 답삭 안겨오던 모습이 떠올라 여전히 마음이 아프고, 더 많이 안아주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


당시 나는 고작 24살이었고, 내 팔 안에 서른 명이 넘는 아이를 품어야 했다. 그 아이 외에도 내가 안아주어야 하는 아이들은 너무 많았다. 많이 버거웠다. 솔직히 지금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당시의 나보다 더 잘 해낼 자신도 없다. 그럼에도 그 기억은 여전히 나를 모자라고 부족했던 선생님으로 만든다.


그 아이뿐이었을까? 매번 내 양 팔 안에는 두 자릿수 아이들을 품고 있어야 했고, 당연히 모든 아이들이 교사의 말을 잘 따라주지는 않았다. 퇴근하기 전 화장실에 가서 변기 위에 앉고 나서야 내가 오늘 화장실에 처음 왔다는 것을 깨달을 정도로 바쁜 날들이었다. 그래! 난 정말 하루하루가 치열했다.


그런데도 매일 부족하고 모자란 교사의 삶이란.......  아마 다른 모든 유치원/어린이집 교사들은 모두 이 글의 앞부분만 읽고도 내가 이야기하려는 게 어떤 감정인지 단번에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리고 말하겠지.


근데 그거 교사만 알아! 아무도 몰라! 진짜, 교사만 안다고!


정말이다. 아무도 모른다. 교사들만 아는 이 감정! 이 느낌! 교사들 말고는 아무도 몰라주는 이 죄책감! 이 느낌은 아마 앞으로도 아이들이 생각날 때마다 같이 따라올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아이들을 떠올릴 때마다 느끼는 감정이 후회뿐이라면 나는 아이들의 사진을 보며 웃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늘 부족한 선생님이었지만 그래도 힘을 내서 아이들과 생활할 수 있었던 건 '한 번'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내 인성 테스트를 하던 아이가 규칙을 잘 지키는 한 번의 순간!

출근도 전에 퇴근하고 싶어 지도록 며칠 동안 야근하며 준비했던 수업을 아이들이 재미있어하는 한 번의 순간!

아이가 대뜸 선생님 사랑해요 하고 짧은 팔로 안아주는 한 번의 순간!

아이에게 장난을 쳤는데 매우 귀여운 반응이 돌아오는 한 번의 순간!


그리고, 내가 열심히 노력한다는 걸 아이들이 알아주는 한 번의 순간.......



선생님은 왜 맨날 맨날 뒤로 걸어요?


어느 날, 줄 맨 앞에서 따라오던 아이가 내게 물었다. 나는 평소대로 맨 뒤에 있는 아이까지 따라오고 있는지 바라보며 뒷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앞을 잘 보고 걸어야죠! 넘어지잖아요."

아이는 내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기까지 했다. 귀여운 질문에 내가 대답하기 전 옆에 있던 다른 아이가 먼저 말했다.

"우리 지켜주는 거지!"

대화를 들은 다른 아이들도 한 두 마디씩 거드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찌나 마음이 찡~ 하던지........

"선생님 다치지 말아요."

"선생님 조심해요."

재잘거리는 말들이 하나 같이 다 사랑스러웠다.


선생님이 자기들을 위해 어떤 노력들을 하는지 아이들은 안다. (물론 하원 후에 하는 일까지는 모르지만! ) 그리고 다른 누가 알아주는 것보다 아이들이 알아줄 때가 가장 뿌듯했다.






마지막으로, 나는 이제 현장에서 물러났지만, 내가 너무 한심하고 부족하게 느껴질 때면 이런 생각들을 했었다.


교사는 모든 아이의 문제 행동을 바꿀 수 없다. 긍정적으로 바뀔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 뿐. 

교사와 아이들이 함께 보내는 시간은 사립유치원 기준 수업일수로 200일이 조금 넘는 시간뿐이다. 사람이 습관을 만드는데 필요한 시간이 (진실 여부는 떠나서) 21일에서 66일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그 마저도 습관 형성을 위해 의도적으로 노력할 때 필요한 시간이다. 기본생활습관 형성이라면 가능하겠다.

하지만 교사가 마주하는 대부분의 문제는 단순한 기본생활 습관의 문제가 아니다..  교사 혼자서는 절대 해낼 수 없는 일들이 더 많다.......


근무환경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는 근무환경을 탓하자. 하드웨어가 아톰이면(빨간 장화 신고 날아다니는 애 말고, CPU) 소프트웨어가 자비스라고 해도 답이 없다.

남을 탓해야 하는 건, 남을 탓하자.


참을 인(忍) 서른 개면 내 마음에 스크래치 하나를 줄인다.

매일 극한의 인내심 테스트를 당하고 있지만 조금만 더 참자. 서른 개로도 부족한 날이 있지만, 서른 번 참고 한 번 터뜨리는 순간, 집에서 머리 감으면서 울 거 안다.




 하루 종일 종종 거리다 퇴근하고도 혼자 마음이 불편해본 모든 선생님들에게 조금의 위로가 되길 바라는 넋두리를 하며, 이번 이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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