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그래피 프리즘
마음을 담은 말 한마디
명언을 줄줄 꿰고 있는 사람이 있다.
무슨 말이라도 할라치면 고대부터 현대까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유수의 인물들이 대거 등장하는 서두를 시작으로 철학과 인문학을 타고 천문학까지 돌아서는, 한 번쯤은 들어봤던 온갖 명언들로 마무리한다.
막힘없이 줄줄 새어 나오는 지식에 처음엔 참 박학다식한 사람이라고 느꼈지만, 시간이 흐르고 대화를 이어가다 보니 그 사람의 말은 한마디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온통 유명인의 입을 빌어 내뱉는 그럴듯한 말들이 가득해서, 처음엔 '와' 하고 벌어진 입과 다르게 머릿속에서는 '그래서?'라는 의문문을 만들게 했다.
좋은 멸치의 내장과 머리를 제거하고 하룻밤 푹 끓여 맛을 낸 깔끔한 잔치국수가 아닌, 전복에 소고기, 닭고기, 송이버섯까지 온갖 좋은 재료를 몽땅 넣고 우려내, 이도 저도 아닌 과한 맛이 나는 잔치국수 같았다.
처칠에서 시작해서 맹자로 끝나는 그의 말은 딱 '과유불급'이었다.
'입만 들썩거리게 하는 명언보다 당신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담백한 한마디가 더 좋답니다.
그런 한마디가 마음을 울리는 힘을 가지고 있거든요.'
머무르게 하는 그림
(지금 생각하면 세상 좋은 환경이었던 작년 여름 어느 날이었다. 나 돌아갈래. 정말 돌아가고 싶다.....)
오랜만에 미술관을 찾았다.
이래저래 일도 많았고, 혀를 내두를 정도의 폭염은 지적 호기심을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날릴 만큼 대단했으니까.
전시장에 들어서면 처음엔 가볍게 전체적인 분위기를 파악하듯 보다가, 마음에 드는 그림 앞으로 다시 돌아와 갈비 뜯듯이 찬찬히 뜯어보는 스타일이다.
( 첫 작품부터 넋을 잃고 갈비를 뜯다 보면 전시실 한 곳만 보다가 체력이 바닥나기에 궁여지책으로 찾은 방법이다.)
3층 5개 공간으로 구성된 전시는 작가의 초창기 작품부터 후반기까지 층마다 일대기 형식으로 기획되어 있어, 일련의 작가의 예술적 변화를 볼 수 있었다.
화려한 색체와 캔버스를 가득 메운 구성이 지배적인 첫 번째 전시실은 많은 볼거리로 제법 오랜 시간 발길을 잡았다. 회화라는 대상을 만나 열정을 담아내는 초창기이기에, 그림에 담긴 구상과 숨겨진 비구상이 혼재되어 있었다.
그렇게 화면을 가득 메우던 화풍은 전시실이 바뀔 때마다, 컬러의 화려함은 점차 사라지고 복잡한 구성은 단순해졌다. 마치 혈기 왕성한 청년이 완숙한 장년이 되어가듯 작품은 드러내기보다 한발 물러서는 방법을 찾은 것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후반기 전시실에 들어서니 동일인인가 싶을 정도로 화풍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산재했던 볼거리가 사라지고 강렬한 모티브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큰 캔버스 내에 시선을 끄는 오브젝트와 그 강렬함에 상반된 텅 빈 여백이 적절히 조화를 이뤄, 관람자가 보이지 않은 공간에서 펼쳐지는 세계를 상상할 수 있어서 좋았다.
작품이라는 가상의 공간을 두고 작가와 관람자가 은유와 사유를 풀어내는 것 같았다.
3개 층에 이르는 전시를 다 보고 나니, 처음 예상했던 시간보다 훌쩍 넘는 시간이 흘렀고,
홀린 듯 전시실을 돌아다니던 다리는 이제야 묵직한 통증을 보냈다.
정말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임박했지만, 방금 나온 마지막 전시실이 다시 궁금해졌다.
그렇게 30분의 시간을 더 보내고 미술관 마감을 함께 했다.
역시 눈을 현혹하는 화려함보다 담백한 울림이 더 마음을 사로잡는 모양이다.
무거운 다리, 홀쭉해진 위, 뿌듯한 마음이 조합해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기분 좋은 여운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