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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 연필 May 31. 2020

내 남편은 효자다1

나와 남편 사이의 거리

  내 남편은 효자다. 효자 남편은 힘들단다. 30대 중반 주위 또래 남자들만 보더라도 그들과 내 남편의 다른점을 찾을 수 있었다. 신혼 초, 남편에 대한 기대가 컸다. 드라마에 나오는 부부와 같이 무엇이든 함께 하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나만 바라보길 원했고, 내 가정에 충실하길 원했다. 하지만 남편은 내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남편은 항상 나보다 시부모님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신혼집에서 시댁은 차 타고 10분, 친정은 20분이면 갈 수 있었다. 남편은 주말에 시골 부모님댁에 가서 농사일을 도왔으며, 평일 퇴근하는 길에는 농사일로 바쁜 부모님을 위해 매일같이 부모님댁에 들러 반찬거리를 사다놓고, 저녁밥을 앉혀 놓고, 빨래며 청소를 하고 집에 왔다. 집에 오면 피곤해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맞벌이를 하면서 신혼집을 남편의 회사와 가까운 곳에 차렸기 때문에, 한 시간 가까이 운전을 하고 집에 오는 나도 피로감이 있었고, 퇴근길에 남편이 먼저 와서 맞이해 주는 상상을 하곤 했다. 하지만 항상 남편보다 내가 먼저 도착했고, 남편은 시댁에 들렀다가 집에 왔을 때 집이 정리되어 있지 않으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직장동료들은 효자 남편은 어렵다며 앞으로 더 할 것이라며 나를 안쓰러워했다. 주말에도 남편은 시댁에 일을 도와 주러 가느라 둘만의 시간이 없었다. 점차 데이트나 여행도 한 번 못하는 것에 대한 서운함이 불만으로 쌓여갔다. 결국,  "대체, 나랑 왜 결혼을 한 거야?"라며 터질 것이 터졌고, 남편은 남편대로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나에게 서운해 했다. 남편은 "내가 너보고 가서 하라고 했어? 내가 내 부모님한테 하는 건데 왜 그래!" 하고 정색을 했다. 그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 결혼 전에는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정색하는 그 얼굴을 보니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생각해보니, 결혼 전부터 나의 결혼생활을 추측할 만한 단서들이 많이 있었음에도 나는 눈치채지 못했다. 아니, 눈치 채고도 좋아해서 가볍게 넘겼다. 말할 때 마다 '엄마가'라는 말을 많이 했고, '엄마는 특별한 존재'라는 말도 들었었다. 오히려 밥을 안치고 나왔다는 말, 부모님 속옷 치수까지 알고 재질도 따져가며 꼼꼼하게 물건을 구입하는 모습, 살림살이를 살뜰히 챙기는 모습 등에 가정적인 남편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결혼을 약속한 후에는 앞으로 결혼을 하면 부모님 댁에 자주 갈 수 없기 때문에 차가 없는 아버님께 선물로 오토바이를 선물해 드리고 싶다 해서 내 카드를 건네 주기도 했다. 결혼 후에도 몇 달 동안 내가 그 카드 값을 갚았다. 왜 웃음이 나오는 걸까... 공교롭게도 결혼하면 자주 갈 수 없을 것이라는 남편의 말이 무색해져 버렸다.


  남편을 보고 있으면 아직 부모로부터 분리되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까지 해야하는 건가 싶었다. 남편은 그 말에 노발대발했으며,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고 했다. 어릴 적, 부모님은 고생을 많이 하셔서 ‘엄마’는 자신에게 특별한 존재란다. 남편의 말들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부모님 세대는 고생 안 하신 분들 없고, ‘엄마’는 누구에게나 특별하다고 되받아 말했다. 남편은 내가 유복하게 자라서 이해하지 못한단다. 나도 어렸을 때, 부모님이 힘들게 일하시는 모습을 보며 자랐고, 부모님께서 바쁘셨기 때문에 할머니께서 많이 돌봐주셨다. 하지만 남편과 같이 행동하지 않는다. 내가 효심이 없는 것인가. 맞다. 난 효녀가 아니다.


  남편이 자기 집안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남편이 말했을 때는 별로 와 닿지 않았다. 나중에 시댁에서 시어머니께 몇 번 듣고 나니 공감이 되었다. 시어머니께서 시집을 왔을 때, 집이 너무나 가난해서 먹을 것도 없었다고 한다. 시어머니는 영양실조에 임신중독증까지 걸려 집에서 둘째인 남편을 낳자마자 병원에 실려갔고, 갓난쟁이는 울지도 않아 추운 겨울, 차가운 마룻바닥에 내놓았었단다. 지나가던 이웃집 아줌마가 애 우는 소리를 듣고 아이가 살아 있다며 아이를 안고 집안으로 안고 들어가 살았다고 한다. 그 아이가 남편이라니, 하마터면 만나지도 못 할 뻔한 아이, 그 아이가 가여웠다. 부모님 세대에나 있을 법한 이런 일이 우리 세대에 일어났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아버님은 염전에서, 어머님은 공사장을 다니며 농사를 얻어 지어 조금씩 살림이 나아지기 시작했지만 증조부모님 두 분이 중풍이 왔고, 증조할머니는 치매까지 왔다. 시어머니는 일을 마치고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올 때면, 벽이며 머리에 대변을 발라놓은 처참한 광경과 마주해야 했다. 그렇게 7년을 간병하셨다. 시어머니는 효부상을 받으셨다. 충분히 효부상을 받으실 만하다. 일을 하고, 아이들을 키우며 시부모 간병까지 하셨다니 스트레스가 상당하셨으리라. 남편은 어릴 적, 엄마가 무서웠다고 한다. 자주 맞았다고 한다. 어머니는 그 시절을 어떻게 견디셨을까. 어린 자식들을 의지하며 견디셨을 것이다. 어머니의 굽은 등이 그동안 어머니의 노고를 말해주는 듯 했다. 누구보다 성실히 사시며 살림을 일구신 시어머니 이야기에 마음이 짠해졌다. 아들도 어머니를 닮아 저리 효성이 지극한 것인가. 하지만 나는 어머니와 같은 효부가 될 자신도 없고, 효부가 될 생각도 없다. 남편의 효성을 인정하고 더 이상 말하지 않기로 했다. 남편말 대로 효도는 셀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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