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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 연필 May 31. 2020

내 남편은 효자다2

안부 전화가 뭐길래

  신혼초, 오전 9시 10분이면 어김없이 전화벨이 울렸다. 회의 때문에 핸드폰을 두고 갔다 오기라도 하면, 부재중 통화가 두 통씩 찍혀있었다. 시아버님이었다. 회의가 끝나고 전화를 드리면 대부분 잘 도착했는지 간단한 안부를 물으셨다. 1시간 가까이 출근하는 며느리가 걱정이 되신 모양이다. 하지만 통화가 길어질 때는 '형제간의 우애'며 '옛날 이야기', '이웃집 얘기' 등 10분 씩 붙잡고 이야기를 하시기도 했다. 오후 3시~4시 쯤에는 남편이 전화를 받지 않는다며 무슨 일이 있냐며 전화가 왔다.


   아버님은 하루종일 내 생각만 하고 계신건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퇴근하면 잘 도착했냐고 또 전화가 왔다. 하루에 두 번은 기본이었다. 이런 시아버지의 행동에 회사 동료들은 혀를 차며, 앞으로 꽤나 힘들겠다고 말했지만 나는 며느리를 아끼는 다정한 시아버지의 마음을 그들이 몰라서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점차, 계속되는 전화로 나중에는 전화만 오면, 눈살을 찌푸리게 되고 전화를 받기도 하기도 꺼려졌다. 


  남편에게도 불편함을 이야기했다. 남편은 걱정이 많으신 분이라 그렇다면서 자기도 매일같이 전화를 받는다고 했다. 남편이 어머니께 말씀드렸는지, 아버님께서는 이제 너희 어머니가 왜 자꾸 전화하냐며, 전화하지 못하게 해서 자주 못할 것 같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하루에 한 번 저녁에만 전화가 왔다. 


 “너희 형님은 일주일에 한 번 씩 꼭 안부전화를 한다. 지금까지 한번도 빼먹지 않고 10년이 다 되도록 하고 있다. 금요일 저녁 7시만 되면 꼭 전화가 온다.”


  덧붙여 친정 부모님께 자주 안부전화를 하라고 하셨다. 전화드리는 것이 아직은 어색하고 어려웠다. 더군다나 비교하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더 하고 싶지 않아졌다. 형님은 센스가 넘치는 사람이었고 나는 곰같은 며느리였다.


  특히, 금요일 저녁 전화는 받기가 더 부담스러웠다. 어머니가 계시지 않는 금요일 저녁에는 약주를 한 잔 하시고 전화를 하셨기 때문에 통화가 길어졌다. 일방적으로 듣는 통화는 벌을 서는 기분이었다. 아버님은 내가 애교 많은 막내 며느리가 되길 원하셨지만 안타깝게 나는 애교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장녀였다. 나에 대한 기대를 많이 하신 모양이다. 


  결혼 4년 차에 하루는 아버님께서는 술 기운에 힘입어 진심을 말씀하셨다. 전화를 자주 하지 않는 내게 서운하시다며 다른건 바라지도 않는다는 말씀하셨다. 하루 건너 한 번 꼴로 전화가 오는데 내가 또 전화를 드려야 하는 건가하는 반감이 들었다. 덧붙여 아들은 효자라 동네사람들이 다들 부러워 한다며 아들만 잘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셨다.

  

  효자 아들의 평에 대한 얘기를 계속 듣다가 어느 구절에서 깜짝 놀라 내 귀를 의심했다. 내가 가정교육을 잘 받았을 것이라 생각하셨다는 말에 심장이 두근두근 뛰고 눈물만 흘러나왔다. 전화 자주 안 한다고 가정교육 얘기까지 들어야 하나 싶었다. 남편이 들어오자, 화살은 남편에게 향했다.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퍼부었다. 남편은 미안하다고 했다.


  3일 후에 아무일 없다는 듯이 안부전화를 드린 내게 아버님은 미안하다고 술 때문에 실수했다고 사과하셨지만 한 번 받은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다. 결혼이 이런 것인가. 둘만 잘 살면 되는 것이 아니구나. 결혼한 것이 후회가 되고 머리가 아팠다. 하나 밖에 없는 형님께 속상함을 털어놓았다. 형님도 신혼 때 똑같이 겪었다고 한다. 이해하라고 한다. 


  “동서, 일주일에 한 번씩만 전화드리면 좋아하셔. 전화만 드려.”

기본적으로 형님은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안부전화를 드리고 있었다.

  “제가 전화 드리려고 하면 그 전에 이미 전화가 와요. 형님. 어떤 때는 제가 잊기도 하고요.”

  "전화 오기전에 먼저해봐. 주말에 알람을 맞춰놓고.”

  “아, 그렇게까지 해야해요?”

  “처음엔 좀 어렵지만 습관되면 괜찮아. 나도 처음부터 전화를 잘했던 건 아냐. 나도 많이 혼나고 서운해 하시고 그랬지. 나는 나를 싫어하는 사람한테 더 잘하는 편이거든. 감히 날 싫어해? 이런 느낌으로. 꼭 날 좋아하게 만들겠어. 이런 오기가 있거든.”


 형님은 경쟁이 심한 서울에서 살다보니, 본능적으로 살아남는 법을 터득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 형님이 대단해 보였다. 형님은 고단수였다. 나는 상당한 스트레스를 동반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 후, 의도적으로 몇 번 전화 드리기를 했다가 그만두었다. 주말에 찾아뵙는데 전화도 해야하는 건가. 이틀에 한번 꼴로 전화가 오는데, 내가 전화까지 드리니 거의 매일 통화하는 느낌이었다.


   어느 날 저녁, 아버님과 어머니께서 연락도 없이 오셨다.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집에 찾아 오신것이다. 전화를 받지 않아 무슨 사고가 난 줄 알고 찾아 오셨다고 했을 때는 좀 당황스러웠다. 항상 걱정과 불안이 많으셨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생각하시는 친정 부모님과 달라 좀처럼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그로부터 3년 후 아이가 태어났고, 아이가 태어난 이후에는 내 생활의 중심이 아이가 되었고, 아이가 우선이었다. 아이와 놀다가 씻기고 같이 낮잠이 들어 남편과 나, 둘 다 전화를 받지 못한 날이 있었다. 내 동생에게 연락이 왔다. “언니, 시부모님이 걱정하시니까 얼른 전화드려.”라는 메시지가 와 있었다. 아버님, 어머님으로부터 부재중 통화가 4건, 5건씩 찍혀있었다. 전화를 드리니 아이가 아프거나 사고가 난 줄 알고 걱정하셨다고 한다. 대체 내 동생 번호는 어떻게 아셨는지...


   결혼 6년차, 남편은 회사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심했다. 그런 시기에 시댁에서 전화까지 자주오니 미쳐버릴 것 같다고 했다. 회사일도 바쁜데 불려가는 것이 일상이었던 남편은 5년이 지나자 지쳐버렸는지 부모님과 가까이 사는 것의 불편함을 토로했다. 그것을 이제야 느끼는 남편이 참 대단해 보였다.


  신혼 때는 주1회 시댁에 갔지만 아이가 태어난 이후, 점차 횟수가 줄었다. 아이가 아플 때는 한 달에 한 번, 한 달을 넘기기도 했다. 아이의 상황을 기준으로 움직였다. 아이가 태어나자 남편보다는 아이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시댁으로부터 예쁨받겠다는 생각도 내려놓았다. 오로지 내 자신의 감정만 들여다 보기로 했다. 나에게 집중하니 남편 탓, 시댁 탓, 다른 사람의 탓을 덜 하게 되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제는 시댁 어른들의 한 마디, 한 마디 말들을 복기하며 혼자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얼마 전, 서울에서 형님네 식구들이 오시니, 아침에 와서 밥 좀 차려드리라고 했지만 가지 않았다. 나는 처음에 농담인 줄 알았다. 하지만 서너번 하시는 말씀을 듣고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 말이 이제 상처가 되지 않았다. “네? 하하하.”하고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웃어넘겼다. 갈등을 싫어하는 성격이라 따박따박 따지고 받아치지는 못하지만 옛날같으면 상처받았을 말을 흘려 넘기는 내공이 생겼다.


  이제는 시부모님께서도 '애교많은 막내 며느리가 되었으면'하는 기대를 접으신 것 같다. 그동안 기대와 실망을 반복하면서 많이 내려 놓으신 듯하다. 요즈음에는 며느리에게 먼저 전화하시지 않으신다. 아들이 전화를 받지 않으면 몇 통씩 전화하지 않으시고, 기다리시기도 하신다. 지금도 아들은 자주 찾으시지만 적당한 거리 유지가 되는 느낌이다. 이렇게 되기까지 5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친정 부모님은 시골 어르신들은 자주 전화하는 것을 좋아하신다며 시부모님께 자주 안부전화 하라고 하시지만 내가 하고 싶을 때 한다. 내 마음 크기만큼 진심으로 행동하고 있다. 요즈음엔 그 정도만 해도 착한 며느리들을 얻어 행복하다고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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