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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현 Nov 10. 2023

선을 넘은 조리사

원감과 조리사의 격돌1

여름캠프는 6세 7세 아이들이 원에서 저녁을 먹고 하룻밤 자는 초대형급행사이다.

30여 명의 아이들의 저녁과 다음날 오전 간식까지 준비해야 해서 주방도 할 일이 많다. 작년에 이어 두 번째라 열흘 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다.

원장, 원감과 몇 차례 논의를 거쳐 캠프 식단을 짜고 급식관리지원센터에 감수를 넣었다. 행사날인 목요일뿐만 아니라 수목금 3일의 식단을 조금씩 변경해야 해서 한 번의 조정을 거쳐 감수가 나왔다.

아침에 감수 확인서를 출력하며 원감에게 감수가 나왔다고 얘기할 때도 그녀는 별 다른 말이 없었다. 다음날이 공휴일이라 감수를 받자마자 서둘러 발주까지 끝냈다.


오후간식인 주먹밥을 만들고 있는데 원감이 들어와 식단표를 보면서 말했다.

"어... 금요일에 현장학습가요."

현장학습날에 김밥을 싸주었었다.

설마 하며 물었다.

"점심은요? 가서 먹어요?"

"아니요, 김밥 싸가야죠."

"네? 그걸 이제 얘기하면 어떡해요?"

"내가 얘기 안 했나? 말한 것 같은데."

거짓말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는 '말했어야 했는데'를 '말한 것 같은데'로 바꾸어 쓰는 버릇이 있었다.


"금요일에 김밥 싸는 건 좀 힘들어. 전날 캠프도 있잖아요....

이번엔 나가서 해결하면 안 돼요?.... 저번 현장학습  가서 먹을까 생각 중이라고도 했었잖아요."

그랬다 지난번엔 원감이 그러길래 내가 뭘 나가서 사 먹냐며 김밥을 싸준다 했었다.


"안 돼요, 나가서 먹을 돈 없어요."

이 말을 하며 원감은 나가 버렸다.

옆에서 듣고 있던 도우미샘이 큰 눈을 굴리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샘, 나 지금 욕해도 돼지?" 

"네, 하세요 해."




내가 아이를 키울 때만 해도 현장학습날 도시락은 엄마들의 몫이었다. 부담스럽기는 해도 그날 하루는 새벽밥을 하고, 는 솜씨 는 솜씨 다 발휘해서 도시락을 싸주었다.

  

요즘은 맞벌이 가정이 많아 현장학습날 도시락은 어린이집에서 해결해 준다. 가서 사 먹는 원도 있다 하는데 나는 현장학습날에는 55명의 도시락을 싸고 주었다.

도시락메뉴로 볶음밥, 주먹밥, 김밥 해봤는데 김밥이 가장 좋다고 했다. 편의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 김밥은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다.

나는 햄과 단무지에 어묵과 볶은 당근채만 넣어 두껍지 않게 만다. 거슬리는 식감이 없고 볶은 당근채의 단맛이 김밥에 감칠맛을 더해준다.


보통 현장학습9시 반쯤 출발하는데 속재료를 볶고 김밥을 마는 시간에 밥 하는 시간까지 계산하면 늦어도 6시엔 나와야 한다. 보조샘 한분도 일찍 나와 돕는다. 그리 수월한 일이 아니며 계획과 준비가 필요한 일정이다.



오후간식을 내보내고 원장이든 원감이든 부연설명을 기다렸다. 일정이 변경되었다면 변경된 과정이 있을 것이다. 미처 전달을 못했다면 미리 전달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얘기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며, 무엇보다 감수와 발주까지 끝내고 다음날이 휴일인 상황에서 김밥을 싸는 게 가능한지 의논을 해야 지만 원감은 그 후로 아무 말이 없었다.


저녁준비를 마치고 나와 검수서를 쓰면서 회의를 하고 있는 원장과 원감을 기다렸다. 평소 회의시간을 훌쩍 넘겨 퇴근시간이 지났는데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

무언(無言)의 시간이 어떤 의도처럼 느껴졌다.




회의 중인 교실에 노크를 하고 문을 열었다.

원장과 원감 그리고 6세 반 샘의 시선이 나에게 모아졌. 말끝자락을 들어보니 회의는 진작에 끝났음을 알 수 있었다.

"회의 끝나셨어요? 제가 이제 퇴근해야 서요.... "

"네, 회의 다 끝났어요. 퇴근하시게요?"

"네... 근데 금요일에 어떻게 해요? 말씀이 없으셔서..."

나는 원장과 원감을 번갈아 보았다.

"김밥 싸야지요."

원감이 나를 쳐다보지 않고 대답했다.

평소 언어에 공을 들이는 사람답지 않게 신경질적인 말투였다.

"목요일에 캠프준비도 해야 하는데 금요일에 김밥 싸는 걸 오늘 알려주면 어떻게요. 내일 공휴일인데..... 새벽에 나와 김밥 싸는 게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잖아요."

전후상황 모르는 샘이 들어도 내용을 알 수 있게 나는 했다.

"그래서요?"

쫓기는 사람이 막 다른 길에 다다르자 싸울 태세로 돌아서는 모습처럼 원감의 목소리는 거칠었다.

예상대로 그녀가 가장 무서워하는 건 공개성이었다. 다른 건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지금 내 앞에서 뭣들 하시는 거예요!"

원장의 한마디에 그 자리는 정리되었다.


노트를 챙겨 교사실로 돌아온 그녀는 자리에 앉았다.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이 이리저리 바뀌고 있었지만 그건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한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내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원감샘이 말한 것 같다던 기억 속에선 제가 뭐라 그러던가요? 알았다고 하던가요?"

"그 얘긴 그만하시구요."

"아니요 저는 그 얘기를 해야겠어요. 한두 번 아니잖아요. 이런 게....."

그녀는 머릿속에서 생긴 김을 입으로 빼듯 숨을 몰아 쉬며 할 말을 고르고 있는 듯했다.

"저한테 감수서를 보여주지 않으셨잖아요."

그녀가 고르고 고른 말은 다소 실망스러웠다.

감수확인서를 봤으면 기억이 나서 미리 알려주었을 것이라는 얘기인가!

도시락을 싸야 하는 현장학습일정을 조리사에게 최소 일주일 전에 알리지 않은 것과 조리사가 감수확인서를 구두로만 알리고 보여주지 않은 걸 대척점이라 생각한 것이다. 어지간이 궁색했던 모양이었다.

"원감샘, 지금 무슨 말하시는 것에요?"

"....."

이 없는 건지  말을 잃은 건지 그녀는 여전히 모니터를 응시하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속으로 되뇌는 말이 내게 들리는 듯했다.

..... 감히 조리사가 원감한테.... 이건 선을 넘었어...


"제가 감수 다시 받아서 발주할 거예요. 조리사님은 출근하셔서 그냥 시키는 일만 하세요."

"네, 그러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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