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썬다운>(2022)
사람이 해 아래에서 행하는 자기의 모든 수고에서 무슨 유익을 얻으리오? <전도서 1:3>
<썬다운>의 닐 주변에는 조언을 건내줄 헤르메스가 없다. 그래서 그는 환각에서조차 자본 축적 수단이었던 돼지를 방치하고 죽였으며, 자신을 구원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고대 그리스에서 남성의 수염은 성적인 역할을 가르는 기준이 되었다. 수염이 있는 능동적 사람은 폴리스의 중심에, 수염이 없는 매끈하고 수동적인 사람은 규방에 속했다. 이제 갓 수염이 나기 시작한 남성의 모습으로 묘사되는 헤르메스는 성숙과 미성숙의 경계에서 연약함과 강인함을 모두 지닌 신이다. 능동적이면서도 수동적인 그는 함정에 빠진 오디세우스에게 키르케와의 성적 계약을 통한 극복을 제안한다.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남성성과 용기를 해하지 않을 것을 키르케에게 다짐하게 하며 동침의 요구를 받아들인다. 타의적으로 겁에 질려 거세를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계략의 명분으로 상징적인 자기 거세를 통해 신체적 쾌락을 담보로 저주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미래의 여정에 대한 정보를 얻는 거래에 성공하며 발기된 남근처럼 강직한 마초적 영웅성에 한 발짝 다가간다.
그렇지만 신의 죽음이 선언된 이 세계는 인간에게 무심하다. 형이상학적 숙고는 무의미해졌으며 신학은 정치에 종속되면서 극단주의 논쟁에 남용되거나 묵시록적인 사상들로 남아버렸다. ‘식돈자본주의’의 최전선에 있던 닐은 하늘에 의지할 수 없고, 의지하지 않는다. 내던져진 존재기에 자유로웠던 그는, 제1세계 백인 재벌로서 무수한 돼지와 노동자의 희생을 통해 자본을 축적한다. 생명의 소진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었던 그는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대낮에 총격 피살 현장을 목격한 바로 그날, 해가 지자 아무렇지 않게 섹스를 한다. 무절제한 폭력과 성욕이 뒤섞여 분출한다.
사드에게 최대의 쾌락은 곧 최대의 파괴였으며, 그는 본성의 자유를 찬양한 성도착증자였다. 닐의 사드적인 방종주의는 어머니의 죽음 전에는 도축으로, 죽음 이후에는 피부암으로 인한 시한부 선고에도 불구하고 뙤약볕 아래에서 자신의 피부를 익히는 자해적 반항으로 나타난다. 그의 살갗은 노릇해지며 마이야르 현상을 일으킨다. 불판 위에 놓여 내장이 튀어 나오는 고통의 기억을 타닥타닥, 하는 비명으로 승화시키는 삼겹살처럼.
부유한 백인 남성의 여유롭고 자기 연민적인 실존적 고뇌가 주는 매캐한 감응이 있다. 이 흔들림이 나의 체념적인 코나투스가 환기한 수치심일까, 아니면 염오감을 주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미묘한 동질감이 느껴지면서 타나토스의 손짓을 애써 떨치려는 나에 대한 욕지기일까. 모두 눈 가리고 아웅일 뿐이다.
이 글 어딘가..
클로디 아멜(2014).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오뒷세이아』
파스칼 키냐르(2007). 『섹스와 공포』
호메로스(2022). 『오뒷세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