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진영의「홈 스위트 홈」
최근 들어 의도치 않게 기억을 소재로 한 소설들을 자주 읽고 있다. 김연수의 『이토록 평범한 미래』, 민병훈의 『달력 뒤에 쓴 유서』, 그리고 최은영의 「홈 스위트 홈」까지. 기억은 우리의 선택에 의해 재구성되는 수동적인 대상이 아니라, 기억 역시 우리를 조작하며 변주된 ‘나’들을 생산한다. 기억에 대한 서사는 시간의 성질을 항상 동반하는데, 문학은 양자역학의 난해한 수식이나 철학자들의 현학적인 언어로 점철된 시간관을 빌리지 않더라도 자유롭게 선형적 개념에서 벗어나 거칠기에 자유로운 관념의 파동을 일으킨다.
「홈 스위트 홈」의 주인공은 시간을 ‘하나의 무언가가 폭발하여 사방으로 무한히 퍼져 나가는 것처럼 멀리 떨어진 채로 공존’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김연수와 유사하게 ‘미래의 기억’을 언급한다.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 장소에 대한 기억은 과거, 현재, 미래에 구애받지 않는 공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소립자로 부유하는 시간의 조각들은 아직 발견되지 않아 정제되지 않은 채 멍하니 기다리고 있기도 하고, 적극적인 구애를 통해 자신을 인식할 수 있도록 발광하기도 하며, 다른 편린들과 충돌하면서 결합되어 고분자의 형태로 신경 회로에 군림하거나, 혹은 더 작게 분쇄되어 알아보기 위해 전보다 큰 에너지를 쏟게끔 유도하기도 한다. 그에게 수치화된 건강 상태와 각종 확률들은 절망을 담보로 희망을 대출받고, 고통을 대가로 얼마간의 선형적 시간을 사들이는 일을 어쩔 수 없게끔 받아들이게 하는 폭력이며, 미래를 구성할 시간 입자를 연마하는 주인공에게는 존엄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도록 하는 것이다.
원치 않는 치료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체념이자 굴복이다. 이것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이자, 사후 처리를 책임지는 산 자들의 권력을 사랑이라는 얄궂은 이름으로 부를 수 있게 한다. 사랑은 너무나 육중해서, 우리의 삶을 질질 끈다. 사랑이라는 유화제는 알 수 없는 기간 동안 우리의 시체와 유령을 잘 반죽해 생체로 기능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지평 좌표계로 고정되어 있지 않더라도 끈질기게 육신을 떠나지 않는 영은 지구가 용납하는 자신만의 중력장을 우리 모르는 새 구축해 두었을 것이다.
그래서 가뿐하게 떠나려면, 우아하게 분해되고 아름답게 썩기 위해서는 사랑을 두고 떠나야 한다. 미련하고 모자란 접착제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소비 기한이 지나 매끈함을 잃기도 했지만, 그 역시 우리와 함께 끊임없이 경계를 뒤틀며 변모하는 수고에 경외심을 가지며 작별을 고해야 한다. 버리고 소멸시키지 않고, 그저 두고 가기. 사랑은 잔반이 아니니까, 혹 잔반이라 할지언정, 사랑이 있다면 아까운 음식을 왜 남기냐며 타박하면서도 대신 먹어 줄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을 테니까. 우리는 오늘도 잔인하게 정의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소하게 사랑하며, 사소하게 미워하고, 사소하게 죽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