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무요원 여우씨의 일일 - 19
N은 인스타그램에서 총 240으로 키(cm) + 몸무게(kg) + 성기(cm)를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수치로 분배해 보라는 글을 보았다. 대부분의 남성이 어떻게 조합하더라도 240으로는 정상적인 신체를 상상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때로는 키가 큰 자신의 친구를 언급하며 너는 멸치니까 여자로 살면 되겠다든지, 남자 친구를 태그해 자기는 그렇게 큰 편은 아니니까 살을 좀 빼면 대충 나눌 수 있겠다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뼈 있는 농담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댓글들을 보며 어째서 사람들은 굳이 애인과 만나는 자리에 지인을 하나 더 불러들여 인공적인 삼각관계를 형성한 후 굳이 깻잎 절임을 먹거나 손질되지 않은 새우를 먹거나 롱패딩을 입는지 궁금해 했고, 3이라는 숫자의 매력에 대해 생각해 보았으나 수학에 관심이 없는 N은 도통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방금 약 2천 년 전 알렉산드리아의 한 유대인 지도자의 설교 내용이 방금 떠올랐다. 필론은 점을 1이라고 한다면 선은 2이고, 면은 3이며, 입체는 3에 깊이를 더한 4라고 하였으며, 따라서 7의 본질은 2차원(3)과 3차원(4) 기하학의 시원이며, ‘모든 비신체적인 것들(보이지 않는 것들)과 신체적인 것들(보이는 것들)을 해명하는 시원’이기에 7은 10 이내의 숫자 중 가장 탁월한 로고스를 가지며, 숫자 3은 모든 현상과 사물의 토대라고 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렇지만 이것은 창세기 해설을 위한 필론의 눈물겹고 독실한 지적 희생일 뿐이며, 아무래도 현대인들은 나 모르는 사이에 쓰리섬을 하고 사는 것 같다고, N은 생각했다.
숫자의 먹이사슬에서 N은 소비라는 모순적인 제의에 참여할 수 없다. N은 키가 165cm도 되지 않는다. 키에서 몸무게를 빼면 20이 훌쩍 넘는 작고 마른 멸치이다. 마른 애들이 크다는 말이 속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고추는 16센치미터이므로 낭설에 경험적인 근거 하나를 얹어줄 수 있을 것이다. N은 자신의 체구에 별로 관심이 없으며 오줌을 쌀 때조차도 치근덕스럽게 매달린 남근을 거추장스러워하기에 없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식욕이 없을 때마다 덜렁거리는 하초를 떼 배꼽에 붙인 후 영양소가 농축된 인공 포궁과 연결하면 편리하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한다. 이런 몽상 속에서 N의 왜소한 몸은 점점 더 작아지면서 방금 태어나 흠뻑 젖은 새끼 쥐가 되고, 온 경계가 흐릿해지면서 전핵 두 개가 만나기 전의 구체가 되고, 이내 둘로 쪼개지면서 검붉은 구슬과 반투명한 올챙이가 되고, 어떻게 새하얀 펄프에 흡수되고 하수구에 흘러가지 않고 비좁은 공간에 갇히게 되었는지, 애액이 범벅된 폭력의 분출의 산물이 되는 운명이란 숫자로 헤아리는 것이 의미가 없는 우연의 과정이라고, 다만 그 우연과 우연의 속에 부분적인 화학물들의 경쟁 활동이 나타날 뿐이며, 무의미가 0이고 의미가 1이라면 ∑무의미 = 의미는 성립하지 않으므로 (무의미)ⁿ = 의미가 맞는 수식이라는 결론을 내리며 역시 숫자의 세계에서 자신은 0임을 당차게 선언할 것을 다짐했다.
0! = 1.
이 글 어딘가..
박상륭(2020). 『죽음의 한 연구』
필론(2022). 『알렉산드리아의 필론 작품집 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