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사건과 오늘의 윤리
위안이 되는 증오의 유혹이 누군가에게는 삶에 대한 끈질긴 집념일 것이다.
그것은 뒤라스가 말한 것처럼 같은 고통과 기다림을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차마 막을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이미 벌을 받았다, 죄를 사할 대상이 없는 세계는 두렵지 않다.
초등학교 교사가 자살을 했다. 아이가 없는 자들은 아이들을 탓했고, 아이가 있는 자들은 부모를 탓했다. 과거의 제왕적 교권은 부활해야 하고 훈육에 물리적 가해는 필수적이라고 외친다. 폭력의 통계가 일상화된 세계에서 손쉽게 내놓을 수 있는 해결 방안이다. 부작용은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된다. 생명과 삶의 정치화는 모두에게 익숙하다, 구조는 우리가 만들어 나가는 것이지만 내 일이 아닌 이상 그저 외재화된 규정일 뿐이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된다는 논리만큼 효율적이다.
폭우로 인해 물에 잠겨 사람들이 죽었다.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동원된 군인도 죽었다. 죽음은 분노처럼 전염성이 있다. 환경오염은 절대로 기상 이변과 관련이 없다고 굳게 믿으며 복날에 닭을 뜯고 고쳐지지 않았던 외양간 탓을 한다. 가축은 69만 마리가 폐사되었다. 가축은 가축이기 때문에 그게 전부였다. 인육은 먹지 않지만 돼지는 먹기 때문에 죽음의 무게감은 달라진다.
게임축제 행사장에 폭탄 테러가 예고되어 참가자들이 대피하는 소동이 일어났다. 소위 말하는 ‘오덕후’들의 행사에 일어날 뻔한 대형 사고는 쉽게 웃음거리가 되었다. 압력밥솥 시한폭탄은 몇 번의 검색만 하면 누구나 손쉽게 제작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대량 살상을 저지를 수 있다.
신림역 부근에서 한 남성이 칼부림을 하며 사람을 죽거나 다치게 했다. 범행의 목표는 단순했다. 타인들이 불행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다른 사람이 불행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살인을 하게 만드는구나.
미군 한 명이 월북을 했다. 미국의 핵잠수함이 부산으로 입항했다. 북한은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경우에 해당한다며 경고했다. 우리의 목숨은 언제나 그렇듯이 다른 사람에게 위탁되어 있다. 나의 삶이 온전히 나의 것이 아닌 원리와 유사하다고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여전히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송신인이 불분명한 정체불명의 기체가 노란 종이봉투에 담겨 전국에 퍼졌다. 기체는 호흡곤란을 일으킨다. 그러게 그런 걸 왜 열어봐, 한다. 그렇게 한다. 봉투로부터 고개를 돌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면 미세먼지가 폐에 끈덕지게 붙는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이제는 이 시국이 끝났으니 코로나를 입에 올리는 것은 철 지난 이야기가 된다.
살기 위해 오늘도 혐오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도 그렇다. 기가 막히게 살아 있지만 기가 막힐까봐 죽을 만큼 두려워서 부지런히 갈등한다.
그러나 살 길을 찾아 나설 기분은 들지 않았다. 그저 죄책감과 세상의 광폭함이 주는 놀라움에 몸서리를 치며 아직 생존해 있음을 느끼는 그 뿐이다. 그것이 알량한 윤리 의식이라고 생각했다.
싫음을 표출하고 건강함을 뽐내는 사람들이 부럽고 무섭다. 슬픔은 공부해야 하고 위로는 예절을 지켜야 하므로 더 긴 시간이 걸리고 합리적이지 못하므로 세계에 잘 적응한 우수종처럼 보인다. 알파들은 자신의 보호막은 긍정한 채로 일부만을 부정한다. 단정하고 차분하게 가까운 위험을 손절하며 자신을 튼튼하게 보호한다.
그러나 자기를 인정하고 연민하는 상태로 부분적으로만 증오하는 것은 강자들이 변증법을 날로 먹으며 부리는 행패다. 오늘도 누군가 죽거나 다칠 것이고 여전히 살아있음에 안도하며 원인의 제공자는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가 될 것이다. 싫어할 수 있는 나를 사랑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