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누구나 알지만 누구도 모르는>
집 안 구석 어딘가, 한 아이가 귀를 막고 숨어 있다. 다른 방에서 들려오는 우악스러운 남자의 외침과 둔탁한 타격, 그리고 그를 말리는 듯한 여자의 목소리. 무언가 깨지고 바닥에 나뒹구는 모습. 화면에서 묘사되는 단편적인 이미지와 소리만으로도 우리는 이 장면이 가정 내에서 일어나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을 보여주고 있음을 바로 깨닫는다. 가정폭력은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주인공의 어린 시절 배경, 이야기의 전환점, 긴장감을 극대화하는 장치 등으로 사용되어 왔다. 올해만 해도 tvN <사이코지만 괜찮아>와 SBS <하이에나>의 주인공은 아버지가 어머니와 자신을 폭력적으로 학대한 과거에 시달렸고, SBS <펜트하우스>는 가정폭력을 자극적으로 묘사하는 데에 열을 올리고 있다. 시청자들은 점점 폭력에 익숙해졌고, 그래서 누구나 가정폭력을 알고 있다.
하지만 가정폭력은 여성의 개인적인 문제로 축소되어 그 실상을 제대로 모르는 폭력이기도 하다. 아내에 대한 가정폭력 발생률은 50.8%(2013, 여성가족부 가정폭력 실태조사)이고 최근 3년간 여성긴급전화 상담의 절반이 가정폭력이지만, 기소율은 8.5%, 구속률은 0.9%로(2016, 한국여성의전화) 가해자는 제대로 처벌되지 않고 피해자는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 언론은 폭력 남편의 구형 소식보다 남편에 맞서 싸우다 상해를 입힌 아내의 징역 소식을 더 신나게 전달한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가정 폭력을 모른다.
신시아 힐 감독의 <누구나 알지만 누구도 모르는>은 가정 폭력 피해 여성들을 지원하는 활동가 킷 그루엘과 피해자에서 생존자가 된 디에나 월터스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다큐멘터리다. 화려한 연출도 배경 음악도 없지만 피해 여성의 이야기를 듣는 활동가의 굳센 시선과 자신을 위해 한 걸음을 내딛는 여성들의 표정을 담담하게 담아낸 영화는 가정폭력을 다룬 그 어떤 가상의 이야기보다도 긴장되고 간절하다. 자신을 쫓는 폭력 남편을 피해 쉼터에 머무르는 여성, 남편과의 재판을 준비하는 여성, 수년간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남편을 살해한 여성. <누구나 알지만 누구도 모르는>은 이 여성들의 목소리에만 온전히 집중하여 미국 사회가 놓치고 있는 가정폭력 문제의 실상을 드러내고 피해 여성을 둘러싼 사회적 통념들에 강하게 맞선다.
많은 사람들이 가정 폭력 피해 여성에게 왜 남편을 떠나지 않았냐고 묻곤 한다. 이 질문은 피해 여성이 노력했다면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가정하지만, 사실 이 가정은 잘못되었다. 가정폭력은 단순히 남편을 떠난다고 해결되지 않으며 오히려 더 큰 폭력을 일으키는 기제가 될 수 있다. 가정폭력 생존자이자 활동가인 킷은 남편이 “자신을 떠나면 찾아서 죽인다”라고 계속해서 말한 것이 두려워 떠나지 못했다. 아내가 떠나는 순간 대부분의 가해자는 주변 지인까지 동원해서 아내를 쫓으며 그를 찾은 후에는 심각한 경우 아내를 살해하기도 한다. 목숨을 담보로 더 큰 위험과 맞설 바에야 차라리 “남편과 함께 있으면 적어도 그가 어디 있는지 알기 때문에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있다”고 킷은 말한다. 제3자에 의한 폭력과 달리 남편이기 때문에 문제가 굉장히 복잡해지는 것도 이유 중 하나다. 킷의 표현처럼 “그의 두 손은 무기이기도 했지만 정원 가꾸는 것을 가르쳐 준 손”이기도 했다.
디에나가 만났던 변호사 중 한 명은 멍으로 얼룩진 디에나의 피해 당시 사진을 보면서도 폭력의 정도가 분명하지 않고 해당 주를 벗어난 일이기 때문에 기소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판사가 남편의 직업이 의사인 것을 알고 피해 여성에게 집이 넓으니 다시 돌아가라고 한 경우도 있다. 남편을 기소하는 것도, 재판에서 폭력을 증명하는 것도 모두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렇게 구형한 남편의 수감 기간이 길지 않아 그가 다시 돌아올 날을 두려워하는 여성도 있다. 한국은 어떨까. 한국에서 가정폭력을 경찰에 신고하면 이를 범죄가 아닌 피해자의 사적인 문제로 취급하며 단순 주의만 주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가해자의 입장을 들어주면서 피해 여성에게 2차 가해를 하는 일도 부지기수다. 한국의 가정폭력 신고율이 1%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경찰과 사법제도가 피해자의 보호를 신경 쓰지 않는 현실을 반영한다.
1997년 한국에서 만들어진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의 목적 조항이 피해자의 인권 보호보다 가정의 유지와 보호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가정 폭력은 형사 사건이 아닌 가정법원의 가정보호사건으로 처리된다. 또한, 2007년 도입된 ‘상담조건부 기소유예’ 제도는 가해자가 상담을 받는 것을 조건으로 가해자 기소를 유예할 수 있게 한다. 이는 가정폭력이 처벌해야 할 범죄라는 인식을 약화시키고 피해 여성을 피해자가 아닌 가정의 존속을 해치는 사람으로 취급하여 제대로 된 보호를 받을 수 없게 한다. 팬데믹 상황 속에서 가정폭력은 증가했지만 이를 위한 정부의 지원은 부족했다. <누구나 알지만 누구도 모르는>은 가정폭력이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의 인권과 생존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문제임을 보여주며 제도적으로 미흡한 가정 폭력 대처에 질문을 던진다. 영화가 던진 질문들이 우리 사회에서도 가정이 아닌 피해자를 보호하는 특례법의 개정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위 영화는 한국여성의전화가 주최하는 14회 여성인권영화제의 상영작으로, 2020년 12월 1일 개막 이후 온라인에서 무료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아래 주소에서 상영작 정보를 확인하고 예매해주세요!
■ 14회 여성인권영화제 개요
슬로건: 우린 흔들리지 않지
기간: 2020년 12월 1일(화)~10일(목)
장소: 온라인 상영관 (추후 공개 예정 / 전편 무료 상영)
주최: (사)한국여성의 전화
이 글은 14회 여성인권영화제 웹기자단 피움뷰어 활동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