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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다감 Dec 15. 2022

주방 언니가 되었다.

효리네 민박에서 아이유가 주방 이모를 했던 것처럼 나는 동네 식당에서 주방 언니가 됐다. 존재만으로 소중한 아이유의 그 알바와 내 알바를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냥 한 번 해봤다.


현실에서 주방 이모는 나이가 좀 있고 조리를 하는 사람을 칭하고 주방 언니는 주방 이모보다 어리고 허드렛일을 돕는 자리다. 전에 알지 못하던 신세계, 식당 주방 언니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점심 장사를 돕는 주방 언니, 주방 보조의 일은 이렇다.

아침 9시에 도착해서 130개 정도의 공깃밥을 뜨고 점심 장사 준비했던 냄비와 솥들을 설거지하고 11시 전에 식사를 한다. 손님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주문 들어오는 수만큼의 조리 냄비 그리고 식사를 마친 그릇들이 쏟아져 나온다. 정신없이 애벌 설거지를 해서 식기세척기에 돌리고 정리하길 반복하다 보면 세 시간이 훌쩍 지나 2시에 알바가 끝난다. 


줄 서서 기다렸다 먹는 음식점 홀이 많이 분주한 건 알았어도 주방이 이렇게 정신줄 빼는 줄 생각도 안 해봤다. 메뉴가 왜 안 나오나 언제쯤 나오나 기다리기만 했지 그 안의 상황은 상상해 보지 않았다. 생각하지 못했던 풍경 속에 있자니 내가 하면서도 경이로웠다. 8시간 동안 제육을 볶는 주방 이모의 팔꿈치는 로봇인 줄 알았다.




알바 첫날은 앞으로 이 일을 계속할 수 없을 것처럼 힘들었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지인과 가족들은 힘들어서 그 일을 어떻게 하려고 하냐고 걱정했지만 나는 가계가 바로 집 앞이고 원하는 시간대에 일 할 수 있고 pay도 좋아서 까짓것 하면 하는 거지 라는 생각했는데 그들은 이 일이 이렇게 힘들 줄 어떻게 알았을까? 뭐든 해봐야 아는 나로서는 신기할 따름이다.


다섯 시간 일하고 집으로 돌아와 두 시간을 드러누워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두 시간 만에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발바닥이 아파서 편히 걸을 수가 없어 어기적 거리며 걸었다. 낮은 싱크대에 오래 서서 계속 수세미를 쓰자니 손목이 시큰거리고 등골이 빠지는 것 같았다. 김장 한 번만 해도 몸살이 나고 봉사 한 번 다녀오면 앓아눕는다고 했는데 어떻게 이 일을 앞으로 계속할 수 있을까 겁이 났다. 


길가에 수 없이 많은 식당마다 이렇게 힘든 일을 매일같이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자리 잡고 있을 거라 상상하니 너무 신기하게 느껴졌다. 기계가 아니고서야 이걸 어떻게 매일 해내나 신비롭게 생각된다.


다행히 내 알바는 대학가 근처라서 겨울 방학 전까지만 일 하기로 했기에 하루 만에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




며칠 전에는 기말고사 피크를 찍으며 손님이 두배는 더 와서 두 시간 연장을 했고 저녁 근무자 사정으로 대타를 뛰게 되어 일 마치고 집에서 두 시간 꼼짝 못 하고 누웠다가 나가서 세 시간을 더 일했다. 그날 밤 자는 내내 꿈에서도 설거지를 하며 뒤척이느라 잔 건지 설거지를 한 건지 알 수 없을 만큼 피곤했다. 


마치 소주를 3병 먹고 일어나 숙취로 울렁거리는 것처럼 어지럽고 몽롱했다.


그렇게 몽롱함을 이끌고 새벽에 내 컴퓨터 책상에 앉아 요새 공부 중인 심리학 인강을 듣고 글을 썼다. 어느새 제정신이 돌아왔다. 이틀 만에 술에서 깬 것처럼 살 것 같고 개운했다. 신기했다. 푹 자지 못했지만 머리가 맑아지고 내가 누구고 여기가 어딘지 느껴졌다. 행복감이 느껴졌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것들에 잠시나마 집중하고 나니 다시 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순간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들에 대해 떠올려봤다.


돈 되는 글을 써야 한다는 집착을 내려놓고 초보답게 지금 쓰고 싶은 글을 쓸 수 있는 기회를 연장해 준 알바 자리가 집 앞에 있어서 고마웠다. 처음 해보는 바쁜 식당 주방에서 정신 차리고 임무 완수할 수 있는 나의 센스가 대견했다. 몸 쓰는 일 해야 할 때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건강한 몸을 가지고 있는 것도 다행이었다. 


갓 지은 밥을 주걱으로 뒤 섞을 때 올라오는 구수하고 촉촉한 수증기가 얼굴을 뒤덮고 시야가 하얄 때에 기분이 좋다. 마스크 너머로 들어온 수증기가 코털을 간지려 콧구멍을 벌름거리는 것도 이상하게 기분 좋다. 한 주걱을 떠 밥공기 하나에 쏙 들어갈 때도 통쾌하다. 한 주걱 한 주걱 뜨면서 '복 받으세요'라며 잠시 후 그 밥을 먹을 사람에게 복을 불어넣어 주는 것도 행복하다. 


기싸움 팽팽한 주방에서 심리학 배우는 여자답게 욕구를 듣고 수용적 태도를 취하며 마음 편하게 일하는 내가 대견하다. 공부하고 글 쓰고 일하는 리듬을 경험할 수 있는 지금이 고맙다. 절대 적응하지 못할 것 같던 일이 2주 만에 익숙해져서 대견하다. 


오늘은 눈이 많이 와서 그런지 손님도 좀 뜸해서 종종 허리를 펴고 서있기도 했고 간단한 메뉴는 직접 챙기고 음식 나가는 걸 돕기도 했다. 관절을 갈아 넣어야 해서 절대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던 일이었는데 금세 익숙해진 데다 고마움도 가득하니 주방 언니인 지금 이대로 아주 좋다.


지금 이대로 아주 살만하지만 그래도 작은 바람이 있다.


방학 후 다시 잡아야 하는 새 일은 관절을 좀 덜 쓰는 일이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일하고 뻗는 내 모습이 효리네 민박의 주방 이모 아이유의 멍처럼 예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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