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노트에 낙서를 자주 하곤 했었는데 자주 썼던 단어가 Vagabond 즉 방랑자였다. 그때는 왠지 멋있어 보이기도 해서 그 말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시간이 지나고 외국과 한국을 계속해서 오가며 살고 있는 나 자신을 돌아보며 그때 무심히 뱉었던 말들이 내 미래에 대한 암시가 아니었을까 싶다.
외국에서 사는 걸 좋다 나쁘다 이분법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다. 개인적으로 둘 다 겪었으니까... 하지만, 나의 삶이 좀 더 다채로워졌다는 것은 사실이다. 9살 때 무작정 중국 소림사 겨울 방학 캠프를 간 것을 시작으로 여러 나라에서 시간을 보냈다.
예전에 김어준 씨가 여행을 많이 하면 '자기 객관화'에 도움이 된다고 했었는데 직접 오랜 시간을 지내고 보니 너무나 공감이 간다. 외국에서 살다 보면 아무래도 고향에서 보다 맞닥뜨리는 낯선 일들이 많은데 그런 것들에 시시각각 다르게 반응하는 나 자신을 반복적으로 보게 되고 그러다 보니 좀 더 사물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자아가 조금씩 자라나는 것 같다.
미국 가기 전에 친구가 미국 가면 총 맞지 않게 조심하라는 농담 식 충고를 해주었는데 막상 가보니까 너무나 평화로웠고, 인도에 가면 깨달음을 얻을 줄 알았는데 막상 가서는 소똥만 주구장창 밟았다. 파리에는 로맨스가 없었고, 무관심했던 한 나라에서는 오래 지내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 자신보다 세상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을 느끼고 현상을 내 입맛에 맞춰서 해석하는 기계적 습관을 고치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외국에 살다 보니 그런 기회들은 많이 주어졌다. 외국인이기 때문에 편견에 자주 맞닥뜨리기도 했으니까.
그러다 가끔씩 아름다움을 경험하기도 한다. 너와 나의 경계가 없어지고 우리 모두 한 배에 같이 타고 있는 운명공동체라는 것을 느낀다. 그러다가도 뉴스에서 테러나 전쟁 소식을 보면 또다시 절망과 두려움을 느끼지만 말이다.
예전에는 주체적으로 돌아다니고 무엇을 할지 정했다면 이제는 삶 자체에 항복을 하려고 한다. 어차피 계획과 기대대로 된 적도 없었고 삶은 언제나 나에게 필요한 것을 주었다. 나는 오만하게 그것을 거부하였지만, 이제는 삶을 배우는 학생으로서 제대로 공부를 하려고 한다. 저 불빛을 따라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걸어가다 보면 언젠가 나에게 주어진 곳으로 도달하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