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만 듣던 SKY대에 드디어 가보게 되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던 그 학교에, 15년 만에 다시 가보게 되었다. 15년. 그만큼이나 나는 녹슬어 있다. 2007년 1월, 고3 직전 겨울방학, 대학 진학의 열정을 지피 우고자 친구와 2박 3일로 인 서울 대학 투어를 올라와서 이 학교에서 추위에 떨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의 나에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이과로 바꿔!"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외부인의 출입이 자유롭지 않을까 봐 30분 먼저 학교에 도착했다. 버스를 타고 병원 앞에 내리니 광활한 횡단보도가 나타났다. 나와 함께 수많은 대학생들이 길을 건넜다. 10시 10분 전이었기 때문에 학교를 향해 질주하는 학생들도 더러 있었다. 이 많은 명문대 학생들이 눈앞에 있다니. 신기하다.
공학관 쪽으로 갔다. 공학관으로 스며들어가는 학생들. 나는 교수님을 찾아뵙는다고 캐주얼과 하객룩의 중간 어디쯤으로 굳이 단화까지 신었건만, 젊음의 패션 텐션은 자유롭고 편안하다. 뭘 입을까도 정말 고민 많이 했다. 너무 차려입어도 눈에 띌 것 같고 너무 후리후리한 것도 안될 것 같고..
걱정과 달리 외부인 통제 같은 건 없었다. 자연스럽게 공학관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문이 반쯤 열려있는 강의실이 줄지어 있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강의실 모양처럼 진짜 계단식으로 되어 있는 강의실에서 교수님들의 강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내가 다닌 학교는 좋은 말로 소수정예였기 때문에 큰 강의실에서 수업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고 그런 경우는 거의 수업이 아니라 초빙강연이었다. 한 교실에 책상이 15개에서 20개 정도 있는 그런 모습이었다. 그래서 얼핏 보이는 중형 강의실의 엿봄에서 내가 누리지 못했던 캠퍼스 라이프가 물씬 느껴져서 나는 조금 들뜨게 되었다.
교수님 사무실 앞까지 연습 삼아 가봤다. 다른 교수님 방과 다르게 문이 열려있었고 불이 켜져 있었다. 대각선으로 그 상황 파악을 한 나는 흠칫 다시 돌아섰다. 약속시간보다 이른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1층 로비로 돌아와 소파에 앉아 숨을 골랐다.
미친 듯이 심박이 뛰어나 명치가 조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떨렸다. 어쨌든지 해내야만 하는 일 앞에서 조금 신중해지고 싶었다. 평소의 나는 신중과는 거리가 있는 캐릭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상태는 이례적인 상황. 정확히 5분 전에 교수님 방문을 노크했다.
면담은 준비해 간 약식자력표를드렸고 연구실을 찾아보게 된 이유, 앞으로 연구하고 싶은 방향을 당연히 물어보셨다. 예상 질문 리스트였기 때문에 대답은 하긴 했다. 휴. 다행
우선은 위탁생을 받아보신 경험이 있고 긍정적인 기억으로 남아있다고 하셔서 굉장히 안심이 되면서도, 나로 인해 평판이 깨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어 동시에 긴장되었다. 연구실 분위기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 바란다고 하시는데, 잘할 수 있겠지, 나?
그리고 내가 제일 걱정했던 학부 전공 문제. 나의 모교가 그래도 선견지명이 있어서 신기하게도 나는 문과임에도 불구하고 미분 적분학, 선형대수학, 확률과 통계, 컴퓨터 프로그래밍까지 학점을 받았다. 선견지명이 없었던 나는 프로그래밍 과목 말고는 모두 성적을 C에 말아먹었지만. 비록 10년도 더 되었고 공부도 개떡같이 해서 더 기억이 하나도 남지 않은, 제로베이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 과목들을 "수강했다"라고 하니 긍정적인 반응이 돌아왔다. 그 정도면 됐다는... 그런 느낌?
대충 미분 적분학과 선형대수 얘기를 꺼냈더니, 이어서 신호 및 시스템, 디지털 신호처리라는 과목이 필수적이라고 하신다. 디지털 신호처리 과목의 자료를 주신다고 한다. 교수님의 동영상 강의와 강의자료 파일까지. 이런 황송할 데가. 내 생각보다 더 친절(?)하셨다. 연구실 방장 박사과정분을 부르셔서 매칭도 해주시고. 자습을 해서 디지털 신호처리 공부를 하면 디지털 영상처리 과목도 같은 방법으로 자료를 주겠다고 하신다. 그리고 1월 31일에 전속이 되면 그때도 연구실의 커리큘럼대로 학습자료를 주신다고 하니 생각보다 잘 짜여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문송인 나도 어쩌면 할 수 있겠다는 일말의 자신감이 새록새록.
교수님과 면담을 마치고 방장님과 연구실로 갔다. 방장보다 내가 2살이 더 많은 것 같았다. 연구실분들은 내가 왔다고 둘러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해주셨다. 출퇴근 시간에 대한 솔직한 얘기들. 선수과목들에 대한 조언들. 프로그램 조언.(매트랩 필요), 연구실에서 제공하는 컴퓨터, 내가 쓸 책상까지 지정해주고. 3학기까지는 3/3/2과목 들으며 30학점 채우면 될 것 같고 학회에는 4-5장 정도의 학술지 논문을 발표하면 되고 그것을 기반으로 학위논문 작성. 선수과목 추천하는 인강에 대한 의견들. 유튜브가 더 낫다는 의견. 그때그때 주제를 검색해서 일부분을 공부하는 게 더 유리하겠다는 의견들.
내가 상상했던 이미지와는 많이 달랐다. 긍정적으로 좋았다. 그리고 다들 똑똑해 보였다... 내가 걱정하고 있는 분야는 별거 아니고 하면 된다는 뉘앙스였는데 그게 내가 더 긴장하게 되는 부분이었다. 긴장이라기보다 동기부여가 더 맞겠다.
어색했지만 따뜻한 환대가 있었던, 그리고 강의자료라는 동기부여를 주신 교수님. 초조해하고 긴장했던 것보다 훨씬 잘 풀렸고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문제의 그 강의자료. 집에 와서 바로 틀어보았다. 1강에서부터 신호 및 시스템 때 공부했던 것을 복습하라는 내용이 나온다. 퀀타이제이션? 오호통재라.. 이런 사태가 이렇게 빨리 다가올 줄은. 비상사태다.
내 수준에 맞는 공부가 필요하다. 문과로서 미국 통계학 석사를 이수한 동료가 추천해준 유니와이즈 강좌를 고민 고민 끝에 결제했다. 미분+선대+공업수학 패키지와 신호 및 시스템 총 4과목에 50여만 원을 지출했다. 충동적으로. 뭐라도 해야 할 것 같기에.
문송합니다. 문송합니다. 문송하지 않기 위해 뭐라고 한다. 뭐하도 할 거야. 유튜브 강의도 찾아본다. 기차에서 타고 내려오다가 유튜브에서 쓸만한 채널을 찾았다. 간간히 무슨 말인지 모를 단어가 나오지만 전반적으로 알아듣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채널을 발견. 공대 선형대수학은 여기서 먼저 들어야지. 핸드폰으로 하는 시간은 이걸로 유익하게 채운다.
이 많은 것들을 하려면 공부량이 많아야 한다. 일과시간엔 유튜브 강의로, 일과 이후엔 유니와이즈 강의로 우선 신호 및 시스템과 디지털 신호처리를 같이 나가보는 방법을 써봐야겠다.
공부량이 많으려면 뇌의 상태 유지가 중요하다. 집중력을 발휘하기 위해서. 체력을 유지해야 한다. 아침 조깅을 한다. 근력 운동한다. 좋은 식사, "시간"맞춰 먹는다.
가장 중요한 잠. 잠을 잘 자자. 이제 오늘 일 썼으니 잠을 잘 자도록 하자.
척척 석사가 되기 위해서는 효율적인 에너지 사용이 필요하다. 잘 자고 잘 운동해서 컨디션 관리를 하며 문화예술의 적절한 활용으로 과열된 뇌를 적정온도로 낮춘다.
시간이 없다. 빠른 태세 전환.
좋은 징후는 안달복달, 초조, 조급함보다는 목표대로 순서대로 해 나가면 되겠다는 자신감이 세팅되었다. 사는 이유가 조금 더 강화되었다. 할 수 있을 거야. 왜 못해. 일단 남이 해놓은 강좌를 쫙쫙 빨아들여보자. 하다 보면 뭐라고 나오겠지.
막상 뚜껑열어보니 뭐 없더라.
이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돈다. 멘털 관리의 핵심 키워드가 될 것 같다.
나는 뚜껑 열어도 뭐 없다. 여기저기 주워들은 걸로 가득하지. 근데 줍는걸 부지런히 하고 있어. 성실하게. 성실하게 주워들은걸 열심히 할 거아.
문송합니다. 근데 공학 좀 매력 있네요. 죄송하지만 제가 매력에 빠져들어 가겠습니다. 하고 싶어서 하는 공부 한번 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