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해. 주어진 건 많지 않았지만 최대한 낭비 없이 노력해왔다고. 내 발로 여기까지 왔지만 누구에게 떠밀려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겠지. -8p
★★★ 02. 사람이 살아 있는 데에는 돈이 들어…… 그 단순한 사실을 깨닫는 데 너무 오래 걸린 것 같아. -16p
★ 03. "아, 죄송. 지금 마법소녀가 제일 많은 곳이 어딜까 생각하면서 왔더니 너무 눈에 띄는 곳에서 튀어나와버렸네요. 용건만 말할게요. 마법소녀 딱 세분만 나오세요. 테러리스트 잡으러 갑시다, 이상." -45,6p
★★ 04. 내가 중요한 사람일 수도 있다는 설렘과 어쩌면 이 일로 잘 먹고 잘살게 될 수도 있다는 계산적인 마음을 넘어, 처음으로 사명감 (그렇게 불러도 될까?) 비슷한 게 가슴에서 솟아나고 있었다. 까짓것 해보자고요, 마법소녀 뭐 그거…… -70p
05. 사실 보이지 않는 힘을 다루는 마법소녀들에게는 모두 비슷한 콤플렉스가 있어요. 크고 작은 차이는 있지만. 같은 마법소녀들 사이에서조차 조금은 무시를 받기도 하고, 스스로도 자신의 힘을 잘 믿지 못하는 경향이 다들 있죠. 예언의 마법소녀인 내가 그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어요. 예언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내 힘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니까요. -92p
★★★ 06. 이번에야말로 내가 쓸모 있는 존재가 된 줄 알았는데. 단순한 쓸모를 넘어 너무도 중요하고 유일해서 대체불가한 존재가 된 줄 알았는데. 내가 시간의 마법소녀일지도 모른다는 걸 의심조차 하지 않았는데. 모든 걸 망친 건 아로아가 아니라 나였다. 어쩌면 내 불운이 너무 강해서 아로아의 절대적인 예언조차 빗나가게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94p
07. 나는 희고 예쁜 편지지를 수놓은 아로아의 못생긴 글씨를 몇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다. 그러다 조금 울고, 그러고 나서는 지난 이틀간 그랬듯 다시 자리에 누워 천장만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97p
08. 나오면서는 착하다는 게 뭘까, 거절을 잘 못하는 게 착한 걸까 생각했다. 거절할 수 없었을 뿐 속으로 꼭 좋은 생각만 하지는 않았는데. -104p
★ 09. 예? 하며 눈을 가늘게 뜨자 아로아는 맞잡은 양손을 붕붕 흔들며 말했다. "당신은 내가 지켜줘야 할 단 한 사람이었던 거예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마법소녀가 아니라, 나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던 거라고요." -110p
★ 10. "사람은 어떤 순간에 '지금 이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까요?" "음…… 너무 행복할 때?" -115p
11. "이런 세계에서 마법소녀가 무조건 선하기를 바라는 건 동화에 나오는 요정이 진짜 있다고 믿는 것보다 더 비현실적이에요. 그걸 이해해버리니까…… 힘드네요." -118p
12. "마법소녀가 생겨나는 이유는 그 사람에게 그 힘이 가장 필요했기 때문이니까. 거꾸로 말하면, 각성 직전의 마법소녀란 세계에서 가장 취약한 존재." (…) "가장 약한 존재들에게 가장 필요한 힘이 부여되기 때문에 소녀들에게만 마법의 힘이 부여되는 것처럼 보이는 게 아닐까. 그게 내 생각이에요." -120p
13. 그럼 나는 대체 무슨 마법소녀가 될까. 아마도 엄청나게 하찮은 능력을 지닌 마법소녀가 될 가능성이 높겠지. 지니고 나간 기억도 없는데 어느새 주머니에서 나온 신용카드 모양 마구를 쥔 채로 나는 생각했다. 아마 곧 아로아도 알게 될 거야. 아로아처럼 멋진 사람은 나 같은 애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 아파졌다. -121,2p
★ 14. 새삼 다른 사람들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길에 빗물이 넘치는데도 누군가 자꾸 현관문을 여닫는다는 것은, 비가 이렇게 오는데도 위층 사람들이 생활을 지속한다는 의미니까. 출근하고 퇴근하고 필요한 것을 사러 가게에 다녀오고, 그런 일들을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는 뜻이니까. 그렇다면 나도 그렇게 해야 한다. 보통이라도 되기 위해서는 보통만큼의 노력은 해야 하는 거다. -127p
★★ 15. 생전 처음으로 누군가를 이기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히 들었는데, 그 상대는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사람이었다. -166p
★★★ 16. 하지만 나는 어쩌면 너일 수도 있었어. 시간의 마법소녀일 수도 있었다고. 그랬다면 네가 나를 이렇게 비웃는 순간 같은 건 오지 않았겠지. 네가 너 자신을 구할 수도 없었을 거고. 어쩌면 내가 이렇게나 바보여서, 무능해서 너는 너일 수 있었던 거야. 조금 비약하면 너는 내 덕에 지금 이럴 수 있는 거였다고. 네가 너인 건 내 덕분일지도 모른다고. -172p
17. 나는 시간의 마법소녀를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이길 수 없지만 이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기고 싶다는 생각…… '싶다'라는 생각. 간절한 희망은 마법소녀를 각성시킨다. 한순간 가장 무력해진 존재에게 우주가 균형을 이루기 위해 부여하는 힘, 그게 마법소녀의 능력이라고 했다. -174p
★ 18. "흔한 얘기인걸요, 세계를 구하고 본인은 망하는 거." -179p
[마법소녀 은퇴합니다] 감상평 ★★★★★
01 마법소녀가 공식화가 된 세상
이 책은 마법소녀가 공식화된 세계관을 그려내고 있다. '전국마법소녀협동조합' 이른바 '전마협'이 존재하며 다른 행성에서 온 외계인이나 세계를 멸망시키려는 악당이 아닌 테러리스트와 같은 현실적인 악과 싸우는 모양새를 하고 있다. "마법소녀"라고 해서 꼭 모든 마법소녀가 "소녀"인 것은 아니다. 한국 최초의 마법소녀이자 전마협의 의장 연리지씨는 거의 할머니에 가까우며, 책의 주인공인 '나'조차 29살임에도 불구하고 예언의 마법소녀 아로아로부터 "당신은 마법소녀가 될 운명이에요." 같은 말을 주고받는다.
예언의 마법소녀 아로아의 말에 따르면 '나'는 시간의 마법소녀가 될 것이며, 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해 큰 힘을 쓸 예정이라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성이 필요하다. 마법소녀에게는 변신을 하려면 필요한 마구가 있는데, 이는 소중한 물건과 맞바꿔 얻을 수 있다. 긴장되는 마음으로 할아버지의 사진과 시계를 맞바꾼 '나'의 마구는 어이없게도 블랙 신용카드로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더 어이없는 건 사실 시간의 마법소녀는 '나'가 아니었고, '나'의 각성을 연습하던 순간 '진짜' 시간의 마법소녀가 각성을 했다는 사실이다.
02 삶, 운명 그러나 기구하지만은 않은
'나'는 1인 가구로,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온전히 혼자가 되어 삶을 이어간다. 그러나 전염병이 퍼지면서 일자리를 잃고 냉장고 할부는 석 달이나 남은 상태에서 면접까지 탈락되는 불운한 일들이 이어진다. 갚지 못한 카드 값 삼백만 원 때문에 죽음을 결심한 '나'의 앞에 예언의 마법소녀 아로아가 나타나며 삶이 송두리째 달라지는! ……일은 없었지만 마법소녀가 될 운명이라는 아로아의 예언에 '나'는 어쩌면 삶이 달라질 수도 있겠다는 기대를 하게 된다. 하지만 그마저도 '나'의 생각대로 흘러가지는 않는다. '나'가 아닌 진짜 시간의 마법소녀가 각성을 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선한 쪽인 아닌 상태로. 전마협은 비상사태가 되어 시간의 마법소녀를 막기 위해 대적하기로 한다.
<마법소녀 은퇴합니다>는 '나'의 시선에서 전개되고 있기에 마법소녀를 바라보는 시선 또한 '나'와 동일시하게 된다. 마법소녀의 삶은 어떨까? 화려하고 영웅적이고 환상적일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죽으려고 결심했던 '나'에게 "마법소녀가 될 운명"이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건네는 아로아의 등장은 마치 <해리 포터>의 해그리드와 비슷하게 주인공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바꿀 만한 계기가 될 것만 같은 인상을 준다. 하지만 마법소녀가 되어도 '나'의 삶은 크게 바뀌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구한 뒤 편의점 알바에 잘리는 여느 때와 같은 평범한 일상을 누린다. '나'는 모종의 이유로 마법소녀 데뷔와 동시에 은퇴를 선언하고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택하는데 이전만큼 '나'의 삶이 불운하지만은 않다. 자신의 마법으로 라면을 빨리 끓일 수 있고 또 아로아가 있으니까. 삶이 크게 바뀌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전과 같지도 않다.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원래의 꿈을 이루고자 하는 희망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03 마법소녀가 아니더라도 내 취향이었을 이야기
<마법소녀 은퇴하겠습니다>라는 황당한 제목과는 다르게 내용은 유치하지도, 마냥 발랄하지만도 않다. '나'의 삶을 무겁지도 않고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게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으며 가상의 세계가 마치 진짜 세계인 것만 같은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나'를 봤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일자리도 잃은 상태에서 면접까지 탈락하고, 삼백만 원이라는 빚이 한없이 무겁게만 느껴져 삶을 포기하려고 한다. 모든 걸 다 잃고 가망이 없어 보이는 상황임에도 어떻게든 먹고 살 길은 존재하는 법이다. 아로아를 만났기 때문에 죽음을 뒤로 미루기는 했지만 마법소녀가 되지 않았더라도 '나'는 편의점 알바를 하면서 혹은 PC방 알바를 하면서 어떻게든 삶을 연맹해 나갔을 거고, 끝이라고 생각했던 이야기는 사실 끝나지 않았기에 '나'의 이야기도 아직 끝나지 않았을 뿐이다. 특별한 삶이란 건 없다. 마법소녀라고 해서 특별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도서관에서 이리저리 쏘다니다 끄트머리에서 이 책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는 보물을 발견한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어떤 내용인지 몰랐음에도 내가 좋아할 만한 이야기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단순히 마법소녀여서 좋은 것은 아니다. 마법소녀라는 운명을 받아들이면서도 조용히 원래의 삶을 살아낼 '나'에게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스물아홉살에도 마법소녀가 될 수 있다면 시계 디자이너가 되기에 늦은 나이도 딱히 없을 것이다.
모두가 기대했던 시간의 마법소녀가 아니었지만, 또 리스크가 있기에 마법소녀로서 먹고살 수 없는 노릇이지만 '나'는 '나'의 삶을 이어나간다. 그 부분이 나는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