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수들이여, 눈을 떠라
<이방인>(알베르 카뮈) 서평
인간은 홀로 살아갈 수 없기에 사회를 만들었다. 사회는 인간들의 집합체이나, 일단 사회가 꾸려지고 나면 그것은 거대한 유기체가 되어 개개인의 합 이상의 의미가 된다. 법과 관습은 그 유기체의 뼈와 힘줄이 되고 그것을 만든 인간은 유기체의 하위세포가 된다.
규칙을 거부하거나 무리에서 이탈하려는 개인은 존재만으로도 사회에 위협이다. 사회는 그들을 ‘이방인’으로 몰아 배척한다. 그것이 가장 효율적인 처리방법이기 때문이다. 구성원을 동요시킬 싹을 잘라버림과 동시에 잠재적 반항아에게 경고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종속을 거부하다 사회로부터 축출당한 하나의 세포다.
20세기 지성의 대명사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은 소위 ‘넘사벽’급 고전이다. 카뮈는 <이방인>에서 문학사상 유래 없던 새로운 인간형을 제시했다. 주인공 뫼르소는 통념에 지배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실존주의적 인물이다.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 격인 이 소설은 개인의 안전과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존재하는 사회체제가 역으로 개인을 구속하고 억압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카뮈는 이것을 ‘부조리(모순적이고 불합리한 상황이나 사건)’라 부른다. 실존주의에서 ‘부조리’란, ‘이성적 인간과 비합리적인 세계 사이에서의 모순’을 뜻한다.
<이방인>은 총 2부로 구성되어 있다. 작가는 1부에서 주인공 뫼르소의 기이한 삶의 방식을 소개하고 2부에서는 사회체제(관습과 재판)의 부조리를 고발한다. 뫼르소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고 관습에 따른 장례절차에 피로와 불편함을 느낀다. 모친상을 치른 직후 여자친구 ‘마리’를 만나 희극영화를 관람하고 저녁이 되자 섹스를 한다. 1부를 관통하는 뫼르소의 주된 가치관은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1부와 2부의 경계선에는 하나의 살인사건이 있다. 어느 날 뫼르소는 ‘햇빛이 너무 강렬해서’ 우발적으로 알제리인을 살해한다. 당시의 시대상(알제리가 프랑스 식민지였고, 뫼르소는 프랑스인이다.)과 살인의 정황을 분석해 볼 때, 뫼르소의 살인은 과실치사 혹은 우발적 살인으로 판결될 법도 했다. 그러나 검사는 뫼르소의 살인을 ‘소시오패스의 계획된 범죄’로 기소한다. 그 근거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점, 살인을 뉘우치는 듯한 행동을 보이지 않은 점 등이다. 소위 ‘괘씸죄’다. 결국 법정은 뫼르소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독자는 1부에서 ‘다소 비상식적으로 느껴질 뿐’이던 뫼르소의 행동이 2부에서 ‘사형판결의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의아함을 느끼게 된다.
독자들은 그제야 카뮈가 던져둔 묵직한 질문에 봉착한다. '관습에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 소위 '괘씸죄'가 사형판결의 근거가 되는가?
뫼르소의 삶을 다시 더듬어 보자. 그는 허무주의에 빠져 방탕한 삶을 사는 배덕자로 보일 수 있다. 하나 깊숙이 들여다보면 뫼르소에게도 나름의 원칙이 있다. 바로 ‘자신이 실제로 느낀 것 이상을 과장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반사회적인 인간이 아니라 선입견이 없는 인간이다. 그는 자신이 직접 겪은 것만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대부분의 인간은 죽음을 접하면 슬퍼하고 간통을 저지르는 인간을 보면 분노한다. 이 ‘슬픔’과 ‘분노’는 ‘죽음=슬픈 것, 간통=나쁜 것’이라는 관념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뫼르소는 ‘관습에 따라 행동하고 느끼기’를 거부한 새로운 종류의 인간이다.
뫼르소에게 사형을 구형한 검사가 주장하듯, 뫼르소는 감정이 결여된 인간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그가 느낀 ‘불편함’과 ‘피로감’은 어떤 식으로든 어머니의 죽음이 그를 자극했음을 의미한다. 태어나 처음 사로잡힌 감정, 미처 그것을 정의 내릴 수 있는 이름을 모르는 감정을 맞닥뜨렸을 때 우린 소위 '멘붕'을 겪으며 불편함과 불쾌감을 먼저 느끼지 않았는가? 뫼르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죽음’이나 ‘슬픔’에 관한 선관념에 지배받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 반응’이 나올 수 없었을 뿐이다.
‘태양’ 때문에 살인을 저지른 뫼르소. 그날따라 태양은 더욱 집요하게 그를 쫓았다. 그는 비처럼 쏟아지는 햇볕에 눈이 멀고 뺨이 탈 것 같다고 느낀다. 아랍인의 칼날에 반사된 빛에 눈을 찔리는 순간 그는 자기도 모르게 방아쇠를 당겼다. 그럼으로써 그는 ‘태양을 떨쳐 버렸다(p70)’. 그는 그 태양이 어머니의 장례식 날의 태양과 같은 태양이었다 말한다. 이것은 우연일까? 독자는 ‘어머니의 죽음’이 그의 살인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쳤음을, 그 매개물이 ‘태양’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뫼르소는 인간을 ‘종족’이 아닌 ‘개체’로 인식한다. 이는 개인의 주체성과 개별성을 존중하는 실존주의적 사고다. 뻐꾸기가 남의 둥지에 알을 낳는다 해서 인간이 이를 비난할 수는 없다. 뫼르소에게 있어 개개의 인간은, 인간과 뻐꾸기만큼이나 다르다. 이들이 서로 다른 가치체계를 갖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가족이 죽었을 땐 섹스를 멀리하는 관습’에 동의하지 않는다 한들 무슨 상관인가.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각자의 선택일 뿐이다.
실존주의가 가장 경계하는 삶이 바로 ‘부조리를 자각하지 못한 채 주체성을 잃고 사회의 일부로만 기능하는 삶’이다. 많은 인간이 관성처럼 그렇게 살다 죽는다. 뫼르소는 온몸으로 그 관성을 거부했다.
뫼르소는 처음에는 자신의 태도가 재판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음을 몰랐다. 하나 점점, ‘사회라는 유기체와 그 안의 세포들이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그의 살인은 명백한, 용서받을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죄였고 그는 그에 응당한 벌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그가 사형 선고를 받은 이유는 사회가 원하는 연극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형 선고를 앞두고 죽음이 예고되자, 뫼르소는 스스로도 놀랄 만큼 강렬하게 생을 열망하게 된다. 사형선고를 뒤집고 ‘생’을 되찾기 위해선 자신의 신념을 굽혀야 했다. 뫼르소의 신념이란 ‘감정을 과장하거나, 사회가 원하는 행동을 연기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뫼르소는 갈등한다.
이때 뫼르소에게 부속사제가 찾아온다. 사제는 말한다. ‘죽음이 끝이 아니며, 현생은 중요하지 않다. 지금 당신은 눈이 멀어 신을 보지 못한다. 신에게 용서를 구하라.’ 이 말을 들은 뫼르소는 둑을 터뜨리듯 모든 분노를 폭발시킨다. 그의 모든 운명이 결정되던 순간이었다. 그는 생각한다. 나에겐 지금 여기, 이 삶뿐이다. 이 우주도 내가 있기에 존재한다. 내가 동의한 적 없는 법과 관습, 타인의 시선, 내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다. 나에겐 내 오감에 와닿는 것만이 진실이다. 나는 살고 싶다. 생을 열망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 강렬한 열망을 접고서라도 지키고 싶은 신념이 있다. 내가 아니면 누구도 외치지 못할 신념이다. 그래서 나는 생을 반납하기로 한다. 그것만이 내가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괜찮다. 모든 인간은 사형수다. 언젠가는 죽을 운명이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여도 똑같은 것이다. ‘지금’ 죽어야 내 신념을 관철할 수 있다. 사형집행일 날 더욱 많은 구경꾼들이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주기를 바란다. 그럴수록 나의 반항은 더욱 유일하고도 가치 있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뫼르소는 생을 열망하면서도 기꺼이 죽음을 택한다. 전체성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반항아’로서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알베르 카뮈는 뫼르소를 ‘영웅적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서도 진실을 위해서는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우리의 분수에 맞는 단 하나의 그리스도’라고 정의했다.
태양 때문에 우발적으로 사람을 살해한 개인과, ‘괘씸죄’로 개인을 사형시키는 사회. 당신의 저울은 어느 쪽으로 기우는가?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함무라비 법전의 원리대로 라면 뫼르소의 사형판결은 정당하다. 문제는 당시 프랑스의 실정법은 그렇지 않았던 것. 뫼르소의 사형판결은 사회질서에 복종하지 않는 개인에 대한 ‘본보기식 숙청’이다. ‘이방인’의 출현으로 동요한 구성원들을 안심시키는 것, 그럼으로써 사회의 존재가치를 공고히 하는 것, 잠재적 살인자에게 두려움을 심어주는 것. 이것은 정당한가? 카뮈가 이방인을 통해 던지는 질문이다.
카뮈는 뫼르소의 삶과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말한다. ‘실존’하라. 남을 함부로 재단하지 말라. 관습과 통념에 지배받지 마라.
뫼르소의 깨달음대로 인간은 모두 사형수다. 그렇기 때문에 삶은 허무한 것이 아니라, 더욱 가치 있는 것이다. 직시해야 할 것은 지금 이 순간, 여기 서 있는 나 자신 뿐. 아무것도 중요한 것은 없다. 그렇기에 오히려 ‘나의 실존’, ‘나의 감각’, ‘나의 신념’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카뮈는 말한다.
사형수들이여, 눈을 떠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