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달은 느리고 마음은 바쁜 아이를 키웁니다> 프롤로그
‘자폐(自閉)’는 ‘스스로 자’에 ‘닫을 폐’, 말 그대로 스스로를 가둔다는 말이다. 과거의 나는 ‘자폐’라고 하면 막연하게 기형도의 시 〈빈집〉을 떠올렸다. ‘장님처럼 더듬거리며’ 방 안에서 문을 잠가 스스로를 가둬버린 서글픈 남자의 이미지를. 아이의 자폐스펙트럼을 인지했을 때 아이가 그런 방에 홀로 웅크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걸어 잠근 문을 열고 싶었다. 좁고 어둡고 음습한 골방에서 아이를 빨리 꺼내주고 싶었다.
아이와 나 사이엔 보이지 않는 벽이 있었다. 라푼젤의 성처럼 높고 견고한 벽이었다. 밖에서 수없이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아이 이름을 부르는 내 목소리는 때론 울음으로, 때론 분노로, 때론 탄식으로 바뀌었다. 벽을 두드리는 손에 멍이 들고 피가 났다. 대답 없는 아이에게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그럴 때면 늘 엄마와 남편 중 하나가 달려왔다. 조언도 비난도 하지 않고 “가서 한숨 자고 와”라며 나를 아이에게서 떼어내 주었다. 돌이켜보면 그 시간이 나를 살렸다. 많은 사람이 아이를 도왔다. 아빠가, 할머니가, 할아버지가, 담임 선생
님이, 치료사 선생님이, 형이, 동생이, 친구가, 이웃이, 그리고 때로는 바람과 노을이, 개미와 나비가.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던 내 아이는 어느 날 “엄마!”하고 나를 불렀다. 아이가 엄마를 부르며 나를 응시하자 비로소 문이 보였다. 문고리가 안쪽에만 달려 있어서 아이가 열지 않으면 나는 들어갈 수 없는 문. 분명 문이었다. 벽인 것 같았지만 문이었다. 우리 아이는 그 문을 열고 나왔다. 엄마를 불렀고 가족을 응시했고 세상을 마주했다. 이 아이는 여전히 자기 세상을 사랑하지만, 불확실하고 불규칙하고 혼란스러운 엄마의 세상도 대체로 따뜻하고 안전하다는 걸 이제는 안다.
‘자폐’의 영문명은 ‘autism’이다. 자기 자신(스스로)을 의미하는 ‘autos’와 상태나 특성을 의미하는 ‘-ism’의 합성어다. ‘스스로를 가두다’라는 의미보다 ‘자기 자신인 상태(자신에게 몰입하는 상태)’에 더 가깝다. 나는 우리 아이가 스스로를 가둔 아이가 아니라 자신의 세계에서 스스로 존재하는 아이라고 생각한다.
아이가 문을 열고 나서야 마주한 아이의 방은 생각했던 것처럼 좁고 깜깜하지 않았다. 넓은 동시에 아늑하고, 질서정연하면서도 다채롭고, 안전하면서도 흥미로운 일들이 가득한 세계 속에서 아이는 살고 있었다.
나는 이 아이가 사랑하는 정글을 두고 인간 세계로 갓 돌아온 모글리 같다고 느꼈다. 아이는 비명에 가까운 울음을 몇 시간씩 울어댔고 물에 빠진 사람처럼 손발을 허우적거렸으며 고장 난 태엽 로봇처럼 한자리를 뱅글뱅글 돌았다. 이는 아이가 속한 세계와 나의 세계의 중력이 다른 탓이다. 지금의 나는 그렇게 믿는다. 내 아이는 자기 세계에 갇힌 게 아니라 두 개의 세계를 살고 있는 아이다. 그래서 나의 세계에서 혼란을 겪는 거라고. 그러니 이렇게 배워야 할 게 많은 거라고.
자신의 세계와 나의 세계를 즐겁게 오가며 노니는 날을 기다리며 아이를 가르치고 내 마음을 다독여 왔다. 아이의 치료를 위해 하루의 대부분을 쓰고 나를 위해 하루 한 시간 글을 썼다. 그렇게 모인 글은 또 하나의 세계가 되어 내 삶을 재건했다.
두 세계의 벽을 허물고 경계가 사라질 수 있다면 좋겠지만, 설령 하나가 되지 못한다 해도 내 세계로 향하는 아이의 발걸음이 언제나 가볍길.
이 글이 두려움을 딛고서 가족과 삶이 있는 세계로 뚜벅뚜벅 걸어 나온 누군가에게 격려와 응원이 되길 바란다. 열리지 않는 문을 두드리며 아이의 이름을 수없이 부르고 있을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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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달은 느리고 마음은 바쁜 아이를 키웁니다>
(부제 : 자폐스펙트럼, ADHD, 특별한 아이를 키우는 기쁨과 슬픔)
2025년 5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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